‘ㅅ’
이현정
25-03-16 23:06
| 시인의 산문 |
‘ㅅ’
이현정
몽상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한마디로 정의해 보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누군가는 ‘엄마’로, 누군가는 직업으로, 누군가는 골몰하고 있는 취미로, 누군가는 성격으로, 누군가는 좋아하는 연예인의 팬덤 이름으로 자신을 표현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만, 한마디로 표현하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몽상가(Dreamer)’가 떠올랐습니다.
COVID-19로 세상이 뒤집혔던 2020년, 답답함과 막연함 속에 주야장천 했던 것은 ‘상상’, ‘공상’이었습니다. 당시 ‘박쥐’가 바이러스의 숙주이자 원흉으로 대두되던 시기였습니다. 박쥐를 멸종시켜야 한다는 칼럼을 읽으며 내가 박쥐라면 좀 억울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나는 나대로 잘 살고 있는데 갑자기 멸종이라니요. 그러다 문득 인간이 멸종시킬 동물을 정할 것이 아니라 여러 종의 동물 대표들이 모여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동물 회의’를 열고 직접 멸종할 동물을 정하는 콘셉트로 동화를 만들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의 결과, 멸종되어야 할 동물은 결국 인간으로 정해지고, 인간이 수를 쓰는 사이에 식욕을 참지 못한 육식 동물의 공격으로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되어 종내에는 식물만 남는다는, 대강 그런 줄거리의 동화였습니다. 애석하게도, 아무도 마감 기한을 주지 않은 이 동화는 여전히 미완이고 어쩌면 영영 미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완화되면서 친구와 가벼운 여행을 떠났던 언젠가, 운전하고 있는 친구에게 이 동화의 스토리를 신나게 읊었습니다. 개구리가 파리를 먹으면 사람이 치킨을 먹는 것처럼 맛있을까 어떨까를 떠들고 있는데 친구가 의아해하며 물었습니다.
“너는 왜 그런 상상을 해?”
“아니, 뭐 꼭 이런 유가 아니라도, 로또에 당첨된다든지, TV에 내가 나온다든지, 그런 상상쯤은 혼자 있을 때 하지 않아?”
“난 해 본 적 없어. 일어나지도 않는 일을.”
머리를 맞아본 적은 없지만, 맞는다면 아마 그런 느낌일 것입니다. ‘쓸데없는’ 상상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구나. 아침부터 잠들기 전까지 시간 날 때마다 온갖 디테일한 상황과 캐릭터를 설정하고 집요하게 상상하는 사람으로서 ‘상상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요즘의 유행으로 굳이 까닭을 찾아보자면, MBTI 성격유형검사 결과, 우리는 S형(현실-감각형)과 N형(추상-직관형)의 양 극단에 있는 사람들이기에 그럴 수 있습니다. 다행히 상상을 하든 하지 않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아끼기에 우리는 계속 좋은 친구입니다.
나의 평소 생활과 인간관계는 매우 단출하고 평범합니다. 고락의 경험이 많지도, 감정의 높낮이가 크지도 않습니다. 그렇다 보니 대체로 시상은 우연히 본 문장, 울림을 주는 낱말,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 속에서 시작합니다. 이런 오브제들이 기억 한편에 남아 있다가 상상에 상상을 더해 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에 늘 풀지도 못할 것을 궁금해하고 닿지도 못할 것에 골몰하는 것이 다행스럽습니다. 쓸데없는 상상을 하고 이룰 수 없는 꿈을 꿀 수 있어서, 정말로 다행입니다.
상상하기 좋은 곳
세상과의 단절이 웬만해서는 불가능한 시대, 세상과 잠시나마 멀어진 사람들이 가장 원초적인 모습으로 함께 하는 곳. 목욕탕에서는 온전히, 그리고 깊숙이 상상할 여유가 주어집니다.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 안온한 물속에서는 현실을 떠난 생각이 마음껏 유영합니다.
2018년에는 유달리 목욕탕에 자주 갔었습니다. 일상의 괴롭힘에서 벗어나 턱 밑까지 물에 잠겨 있으면 번잡한 현실은 달아나고 상상이 슬슬 물매질을 하였습니다. 그즈음, 세신사의 리드미컬한 손놀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쩌면 진즉에 그 손놀림에 매혹당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축 늘어져 엎드린 이는 방금 명품 로고가 가득한 옷을 등에 업고 있던 사람입니다. 맨살의 등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동물의 세계에서는 목숨을 내놓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세신사 앞에서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저렇게 헐벗은 등을 드러내고 목숨을 내놓은 마냥 고분고분해집니다. 등에 닿은 세신사의 손이 스륵 움직였습니다. 대패질하는 목수가 겹쳐 보였습니다. 이윽고 세신사의 꿈이 조각가였다면, 세파에 거칠 대로 거친 북두갈고리 손의 남성이라면. 상상이 상상을 불러 머릿속에 그려진 장면은 글자를 타고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생각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이 괴롭힐 때면 목욕탕을 찾습니다. 어쩌면 그곳은 어머니의 따뜻한 양수 속에 있던 가장 처음의 내가-무의식의 내가 깨어나는 곳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조각가가 꿈이었던 팔목 굵은 사내는
대리석 목욕대 위 모델을 흘깃 보고
한 됫박 첫물 뿌리며 데생을 시작한다
한때는 눈부셨던 세차장 사장도
지금도 눈부신 성형외과 의사도
실상은 꼼짝 못 하고 몸을 맡긴 피사체
깔깔한 때수건 조각도처럼 밀착시켜
핏줄까지 힘주어 묵은 외피 벗겨내면
곧이어 환해진 토르소, 두 어깨 그득하다
수증기 송송 맺힌 목욕탕 한편에서
날마다 극사실주의 석고 깎는 조각가
두 손은 북두갈고리 거친 숨을 뱉는다
-「세신사」 전문
없지만 있는
‘시간’은 인간이 만들고 약속한 개념일 뿐, 존재하지도, 흐르지도 않는다고 현대의 물리학자들은 말합니다. ‘시간’은 공간이나 운동의 변화, 엔트로피의 증가를 설명하기 위해 인간이 만든 가상의 개념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인식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지만 과거-현재-미래는 ‘이미 존재하는 것’이라고도 하고, 미래는 여러 갈래로 존재하며 중첩되어 있다가 우리가 ‘관측하는 순간’ 결정된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은 분명히 있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유전자, 환경까지 불공평함이 디폴트값인 인간에게 주어지는 공평한 자원이며 누구도 끝을 알 수 없지만 누구나 끝은 반드시 있는 유일한 자원입니다. 영원을 얻고자 불로장생을 꿈꾼 천하의 권력자도, 일세의 부자도 결국 시간 앞에, 자신이 가진 시간의 ‘소멸’ 앞에 모두 똑같았습니다. ‘시간’ 없이는 생명체의 자람과 늙어감을, 희미해져 가는 기억을 인간의 뇌가 가진 한계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영원’이 주어진다면 시간이라는 개념은 필요 없을지도, 드디어 인간은 과거-현재-미래라는 모든 시간의 차원을 한 번에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린 시절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문학이나 역사서를 많이 읽었습니다. 방에 불을 다 끈 채 스탠드 하나만 켜 놓고 책을 읽다 잠들곤 했습니다. 덕분에 돌이킬 수 없게 눈이 나빠졌지만,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또다시 불빛 하나에 의지해 책을 읽다 잠들고 눈은 이토록 나빠질 것입니다.
성인이 된 후부터 심리, 철학, 예술 분야의 책을 탐독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는 과학과 관련된 책이나 강연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는 것이 더 많지만, 알아갈수록 과학자들이 발견한 개념과 원리가 세상의 진리와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짙어집니다. 과학을 전공한 친구에게서 수학-과학-철학-신학으로 학문이 연결되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고대의 학자들이 수학자이자 과학자이고 철학자인 까닭이, 인류의 선각자들이 말하는 삶의 진리가 과학적으로도 증명되어 가는 것이 결국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습니다.
과학의 여러 영역 중에서도 물리학에서 다루는 ‘시간’은 특히 흥미롭습니다. ‘시간’은 수학이자 과학이고, 철학이며 ‘머글(인간)’에게는 ‘심리’의 영역이기도 합니다. 어떤 시간은 빨리 가기도, 어떤 시간은 느리게 가기도 하고 어떤 이에게는 찰나도 줄 수 없는 시간이 어떤 이에게는 영원을 맹세할 만큼 있기도 합니다. ‘없지만 있는’ - 이 광활함과 모호함이 주는 여지는 신비롭고 아름다우며 또한 잔인합니다.
유한한데 끝도 알 수 없는 시간이 주어져 있기에, 인간은 ‘가치’를 생각합니다. 인간은 가치 있는 것을 위해 시간을 씁니다. 그것은 돈이 될 수도, 일이 될 수도, 취미가 될 수도, 혹은 어떤 ‘존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골똘히 이어가다 보면, 짧은 생에서 시간을 나눈다, 시간을 들여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귀한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곤 합니다.
그중에서도 ‘누군가’와 시간을 ‘함께’ 나누는 것은 더욱 각별합니다. 시간을 나누는 대상은 가족이 될 수도, 친구가 될 수도, 반려동물이 될 수도, 연인이 될 수도, 동료가 될 수도, 유명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의 아득한 유한함을 누군가와 공유하는 것. 형태는 모두 다르지만 우리는 그것을 아주 큰 의미로 ‘사랑’이라 부릅니다.
시간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있습니다. 시간은 흐를 수도 흐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존재’는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존재를 마주했을 때, 비로소 그동안 없었던, 내가 몰랐던 시간이 생기고 또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1
아무도 몰랐을 때 허수였던 미지수
누군가 보았을 때 또렷한 실수가 되고
서로를 바라보면서
비로소 상수가 된다
2
별에서 온 원소로 된 당신과 나 사이
뜨겁고 밀도 높은 한 점을 시작으로
끝없는 공간을 흘러
하나가 되는 공식
3
소녀가 소년에게 조약돌을 던졌다
날아간 조약돌이 일으킨 물보라
돌아본 소년의 눈빛에
긴 시간이 깨어났다
-「우주가 되는 공식」 전문
인간은 별과 같습니다
인간은 어떤 원소로 구성되어 있을까 찾아본 적이 있습니다. 수소, 헬륨, 탄소, 산소, 질소……. 인간은 이런 것들로 구성되어 있답니다. 그런데 그것은 별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인간과 별을 구성하는 입자가 같은 셈입니다. 인간이 별에서 온다는 것은, ‘별에서 온 그대’는 추상적이고 문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어쩌면 정말 과학적인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가깝고 소중한 이의 죽음을 남들보다 조금 더 일찍 보았습니다. 어머니가 그랬고, 외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근래에 작은어머니까지. 인간은 별에서 왔다지만 죽어서도 별로 간다고들 합니다. 새하얀 가루가 되어-별과 더 닮은 형태가 되어서 나의 소중한 사람들은 별의 상태로, 별로 되돌아갔습니다.
소멸은 또 다른 차원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종종 인간의 소멸은 존재의 형태만 달라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소멸한 이들은 어딘가에 혹은 아주 가까이에 다른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변의 죽음이 조금 덜 슬프게 느껴지기도 하고 나의 죽음 또한 그다지 두렵지 않아집니다. 그저 바라는 것은 나를 비롯한 모두가 소멸의 순간을 맞을 때 너무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혹여 그 순간이 외롭고 고통스러웠다면 돌아간 별에서는 부디 누구보다 행복하고, 따뜻하고, 온전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인간이 죽듯 별도 죽습니다. 오리온자리의 베텔게우스는 수천 년 내에 폭발로 생을 마감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폭발의 잔해는 또 다른 생명체를 만드는 재료가 된다고 합니다. 별의 죽음으로 또 다른 생명체가 태어난다니. 그 생명체는 어쩌면 이미 지구상에서 소멸하고 없을 내가 혹은 당신이, 혹은 돌아가신 엄마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
오리온 별자리 왼편 어깻죽지에는
검붉게 부풀며 요동치는 별이 있지
날마다 몸을 사르며 울부짖는 별이 있지
왼쪽 가슴이 죽어가던 엄마도
부푼 림프선으로 사투를 벌였지
모질고 뜨거운 멍울 날마다 짓눌렀지
별은 죽을 때면 산산이 빛나는데
그날의 엄마도 반짝하고 빛이 났지
왼편 몸 가득히 흩어진
별 조각들
사무쳤지
-「베텔게우스에게」 전문
파리 목숨
평생 초파리 연구를 하셨다는 어느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니, 왜 초파리를? 초파리는 염기서열이 다 밝혀진 생명체여서, 인간의 유전학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훌륭한 연구 대상이라고 했습니다. 광선에 쏘여 유전자가 조작되고 유전자 가위로 편집되어 본능도, 본래의 모습도 잃은 실험실의 초파리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짧은 생을 살며 세상에 남길 것이라고는 자신의 대를 잇는 유전자밖에 없을 것인데, 그조차 녹록지 않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는 유익한 일입니다만, 초파리에게는 참담한 일입니다.
실험실 초파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초파리의 붉은 눈이 사람의 충혈된 눈과 묘하게 겹쳤습니다.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더 ‘힘센’ 이들에 의해 생이 좌지우지되는 ‘파리 목숨’은 비단 실험실 초파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옛날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또 우리 주변에서, 나에게 또 당신에게 해당될 수 있는 말입니다. 법률 용어상 갑은 계약의 주도권을 지닌 당사자이고, 을은 상대적 약자를 뜻합니다. 세상에는 ‘갑’보다 ‘을’이 훨씬 많습니다. 하지만 ‘갑’의 힘이, ‘갑’의 기록이 항상 우위에 있고 힘이 셉니다. ‘을’의 기록은 주로 참다못해 터져 나온 함성과 수많은 목숨, 피의 값으로 쓰입니다. 대부분의 ‘을’은 그렇게 하루를 꼬박 바치고, 생을 바쳐 자신의 기록을 쓰고 있습니다. 초파리처럼 붉은 눈을 하고서.
1
염기서열이 다 밝혀진 생명체 초파리는
온갖 광선에 쏘여 유전자가 조작됩니다
본능도 통제됩니다 의지도 사라집니다
2
몸통이 짓이겨지고 마음이 잘려 나가도
어떻든 오늘 일은 반드시 해야 한답니다
그것이 계약이니까요 나는 매양 무력합니다
3
존엄하게 살 권리도 죽을 수 있는 권리도
없는 자의 눈시울은 꼭 같이 붉습니다
빼곡히 하루 다 바쳐 을의 기록 새길 뿐
-「을의 기록」 전문
기특하고 갸륵한 모든 생을 위하여
1900년대 중후반까지도 딸 부잣집이 유독 많았습니다. 남아선호사상이 강했던 시대, 아들을 보기 위해 ‘피치 못해’ 태어난 딸의 이야기를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딸을 낳은 산모는 미역국도 못 먹었다던가, 딸은 평생 생일상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내게 글을 가르쳐 주신 스승님도 연이은 딸 끝에 찾아온 ‘귀한 아들’이셨습니다. 스승님이 바로 위 누님인 다섯째 누님을 추모하며 쓰신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스승님의 다섯째 누님은 제 나이에 입학하지 못하고 세 살 어린 동생과 같이 삼 년이나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하셨습니다. 교육의 권리나 의무 때문이 아니라, 남동생의 보호자로 입학이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 누님은 우등상을 받을 만큼 공부를 잘하셨지만 결국 진학을 포기하고 어린 나이부터 직장에 다니셨다고 합니다. 그런 누님께 시인으로 이름을 남기게 된 남동생은, 마치 자신이 그리된 것마냥 큰 자랑과 기쁨이셨다고 합니다.
미역은 빛을 통해 스스로 양분을 만들고 제 몸을 바치면 포유류가 젖을 나오게 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런 갸륵한 존재는 보통 먹이사슬의 아래쪽에 있거나 살아 있는 먹이가 굳이 필요치 않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푸른 곰팡이, 땅을 비옥하게 하는 지렁이, 하천을 깨끗하게 하는 피라미가 그렇습니다. _ #곰팡이 #토룡을 아시나요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피라미처럼
생일날 미역국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딸 부잣집의 딸들은 기특하고 갸륵한 ‘미역’과 같습니다. 자신보다는 가족을 위해 살았던, 내게도 응당 주어져야 할 관심과 애정을 기꺼이 내어 준 숭고한 마음과 보탬 덕에 가계가 유지되고 다른 생이 주목받습니다. 지금도 기특하고 갸륵한 모든 생은 주목받지 않더라도, 대접받지 않을지라도 묵묵하고 굳건하게 세상을 굴리고 있습니다. 그런 모든 존재에게 -어쩌면 나와 당신에게- ‘덕분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딸 부잣집 넷째 딸은 날 때부터 덤이었다
해산 후 미역국도 못 받은 산모처럼
한평생 생일상 한 번 맘 편히 받지 못했다
제 밥그릇 타고나니 내버려둬도 살겠지,
파도가 우는 대로 파랑이 밀치는 대로
그 누가 돌보지 않아도 발아하던 생의 포자
먹이 사슬 맨 아래, 빛만 먹고살면서도
제 몸의 몇 배 되는 포식자를 이고 지고
바위틈 아무 데에나 무덕무덕 피어나던
해풍에 머리색도 다 빠진 흰 노파는,
땅 위의 숨탄것들 젖어미 되어 주는
바닷속 돌미역같이 살았노라, 말했다
-「미역, 그 갸륵함에 대하여」 전문
마티스의 그림처럼
오로지 미술관을 가기 위해 파리에 간 적이 있습니다. 직접 본 다비드의 나폴레옹 대관식은 웅장함과 정교함의 극치였습니다. 행복을 전하는 르누아르의 작품도 좋았습니다. 프랑스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귀스타브 모로의 아틀리에는 신비롭고 몽환적인 그림으로 가득했습니다. 고흐, 피카소, 로댕……. 인류사의 한 획을 그은 작품을 실제로 보았던 감동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앙리 마티스의 그림은 그중 단연 으뜸이었습니다. 마티스의 그림을 참 좋아합니다. 그의 그림을 처음 책에서 보았을 때, 이게 뭐야, 싶었습니다. 그림을 너무 못 그리지만 ‘좀 배우면 나도 곧 그리겠다’ 싶은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의 그림은 고전적으로 ‘잘 그린 그림’이 아닙니다. 거침없는 원색에 거칠고 단순한 형체는 고전적인 미술 작품과 같은 디테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보다 보면 역동적인 감정이 살아나고 입체와 운동감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피카소는 그런 그의 그림을 보고 ‘마티스의 뱃속에는 뜨거운 태양이 있다’고 했습니다. 뜨거움과 새로움, 강렬함과 꿈틀거림이 그의 작품 속에 있습니다.
사진기의 발명은 미술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사진기의 발명 후, 미술은 얼마나 실제와 똑같이 그리냐를 따지던 ‘재현 미술’에서 벗어나 내면을, 감정을, 빛을, 의미와 상징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 사진기보다 더 정교하게 그려내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미술은 추상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마티스의 그림은 그 시작점에 있었습니다.
얼마 전, AI가 만든 곡이 공모전에서 1위를 하여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충격적인 일입니다. AI가 이렇게나 빠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사진기의 발명이 화가에게 질문을 던졌듯, AI의 발명은 음악가에게, 작가에게, 모든 예술가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보다 더 아름답게 만들 것인가.
마티스의 그림에서 답을 찾아봅니다. 그의 그림은 당시에는 없던 새로움-독창으로 가득합니다. 그 속에는 새로운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누구나 그릴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무나 그리지 못합니다. 설사 누군가 똑같이 그리더라도, 심지어 마티스를 넘어선 결과물을 만들더라도 마티스의 그림과 같은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고유한 그가, 그 시대에’ 그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움-독창, 아름다움과 고유함. 마티스의 그림에는 이런 예술의 본질이 잘 담겨 있습니다.
AI가 인간보다 더 자주, 더 많이 아름다운 창작물을 만들고 사람들이 그것을 예술로서 소비할 날이 언젠가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미 왔는지도 모릅니다. 주변의 작가, 예술가들은 이제 이 새로운 시대를 어떻게 맞을 것인지 깊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런 고민을 함께 이어가다 보면 그 끝에는 결국 ‘사람’과 ‘새로움’이 서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술의 주체와 객체는 모두 사람입니다. ‘사람’이 하기에 가치가 생기고, ‘그 사람’이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독창성, 창의성이야말로 ‘인간다움’을 정의하는 최후의 요소일 것입니다. 미술가들이 사진기가 담아내는 ‘진상(眞像)’을 넘어 ‘추상’으로 나아갔듯 이 시대의 예술가와 인간은 인공지능을 넘어 또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갈 것이고 그래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창조하는 인간-호모 크레아티부스(Homo Creativus)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시조를 가르쳐 주신 스승님께 등단 소식을 전했던 날, 스승님은 딱 한 가지를 당부하셨습니다. ‘새롭게 쓰라.’ 제자를 보아하니, ‘고전적으로 아름답게 쓰기’는 좀 틀린 것 같아서 하신 말씀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그 말씀은 지금까지도 시작(詩作)의 중심추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누군가 내게 어떤 작가가 되고 싶은지 묻는다면, 나는 ‘마티스의 그림과 같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겠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마티스의 그림처럼, 야수파 앙리 마티스처럼, 스승님의 당부처럼 오직 새롭고 뜨겁게 쓰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고요히
하지만 누구보다 느껍게
순하게
그러나 여지없이 단단하게
겸허히
그럴지라도 죽도록 간절하게
123
깊게
그리고 더없이 담박하게
짙게
그렇지만 하염없이 순수하게
뜨겁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김없이 뜨겁게
- 「뜨겁게·1 - 좌우명」 전문
아름답기 때문에
이 책에 담긴 시는 모두 일정한 형식을 갖춘 정형시-‘시조’입니다. 그리고 나는 글 쓰는 사람, 시조 시인입니다.
시조를 계속 쓸 것인가, 왜 시조를 쓰는가라는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질문하는 사람에 따라 그 질문은 시조의 정체성을 지켜가라는 당부로 들리기도, 관심과 애정으로 들리기도, 걱정으로 들리기도, 패시브-어그레시브(Passive-aggressive)로 들리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계속 시조를 쓰는지. 처음 글을 시조로 배워서? 시조로 등단했기 때문에? 시조로 청탁이 들어오니까? 그런 이유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속 시원한 답은 아닙니다.
나는 개인의 영역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 굳이 나의 관심을 원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는 곳에 오지랖을 부리거나 관심을 갖는 일이 좀처럼 없는 편입니다. 다른 사람의 압박이나 강요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고수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 성향인 탓에, 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시조를 쓰는 이유는, 어떤 우연 혹은 필연으로 시작되었든 간에 이 형식이 내게 잘 맞고, 재미있으며, 끝내 이 형식으로 글을 완성했을 때 아름다움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시조는 쓰는 맛과 읽는 맛, 보는 맛이 형형(形形)합니다. 수학자들이 완벽한 공식을 보고 희열과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처럼, 까다롭기 짝이 없는 이 형식 안에 내가 원하는 내용이 담겼을 때, 나는 희열과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아름답기 때문에.
내가 시조를 쓰는 이유에 대해, 써야 할 이유에 대해 이보다 맞는 답을 찾기가 아직은 어렵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가 예뻐서, 멋져서, 귀여워서-결국 어떤 형태로든 아름다움을 느꼈기 때문이듯이. 이 형식으로 글이 완성되었을 때, 나는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결국, 아름답기 때문에. 그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人’
굳이 의식하여 쓴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이 글의 주요 키워드는 초성 ‘ㅅ’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ㅅ은 사람(人)을 뜻하는 한자와 비슷하게 생기기도 했습니다.
ㅅㅏ람. 읽어주고 소통하는 사람이 있어야 글은 생명을 가질 수 있습니다.
소중한 사람. 당신의 귀한 시간을 내어 여기까지 섬세하고 집요한 상상과 생각의 산물을 읽어주어 정말 고맙습니다. 이제 이 책에 실린 글은 나의 손을 떠났습니다. 나를 떠난 글들이 한순간이라도 당신의 마음을 붙잡는다면, 그래서 혹여 오래도록 곁에 머물 수 있다면 그것이 나에게는 곧 영원과 견줄 ‘ㅅㅏ랑’이 될 것입니다
<지구를 돌리며 왔다>
이현정 시집(시인수첩 시인선 093)에 수록된 산문
이현정 시인
2018년 《중앙신인문학상》 201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등단. 2024년 서울문화재단 첫 책 발간 지원 사업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