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을 나눠 먹어요>

시인선 099 / 고영숙 시인

25-09-01 10:10

 

고영숙 시집(시인수첩 시인선 099)

 

은유 뒤에 숨은 한 생은

순간의 이미지였다

 

 

고영숙 시인은 인간의 내면적 상처와 그 치유, 가족과 사회라는 거대한 맥락 속에서 개인이 겪는 고통과 연대, 그리고 꿈과 희망을 섬세하고 깊이 있게 탐구한다. 삶의 경계에서 마주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시적으로 탐구하고, 현실과 이상 사이를 넘나드는 삶의 무게를 시어에 담아낸다. 소소한 일상과 가족 내 갈등, 사회적 약자의 고통 등을 연대와 치유의 의지를 담아 구체적인 이미지와 공감적 언어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산문 「은유 뒤에 숨은 한 생은 순간의 이미지였다」는 ‘여자’와 ‘남자’의 각기 다른 시선, 이들의 생애를 끌고 가는 슬픔, 세상의 무심함 속에서 만들어지는 연대와 따뜻한 약점 등을 이야기한다. ‘여자’와 ‘남자’,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는 오늘의 ‘공산(空山)’ 풍경을 서사적으로 조직해 한 사람의 생애, 동시대인의 아픔과 온기를 담아냈다.

상실로 강행되는 치열한 현실이다. 고영숙 시인은 고통 앞에서 몇 번이나 신의 이름을 부르는 인간의 좌절을 지켜보며 부재중인 신을 소환한다. 가장 나약한 존재로 슬픔에 결박당한 흔적들, 감각에 의존하는 전생을 경유해 다시 현생으로 이동하는 무의식의 삶을 방관하는 신을 환기시킨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간병에 허덕이다 스스로 무너지는 사람들, 온힘을 다해 취업난을 헤쳐 나가는 푸른 청춘들, 유리 교실 속 지키지 못한 안타까운 교사의 죽음, 주민번호가 없이 그림자로 살아 온 아이들의 발자국도 보인다. 몇 번을 허물고 다시 지으며 언어의 모래성을 쌓는 감정노동자, 고영숙 시인은 거스를 수 없는 전생을 원초적 슬픔의 뿌리로 정의하며 연민의 시선으로 이들을 끌어당긴다. 절제된 슬픔은 강한 내면의 힘으로 타인의 눈물을 읽는 힘이 된다. 수많은 화자들의 흐트러진 눈물의 결정체와 아름다의 빛의 결정체는 동의어라고 그만의 기록으로 쓰여 지는 페이지는 절망의 한계와 희망의 가능성 앞에 선 절실한 이들에게 보내는 찬사이기도 하다.

 

책속에서

 

깃털처럼 얇은 사람들이 포개져 있다

 

송곳으로 그은 가파른 심장을 가지고 놀다 뼈를 깎듯 바스러진다 그깟 사랑들 그깟 이별들은 한 끗 차이라고 우리에게 들이미는

 

흰 비늘의 꽃

― 「티슈」 전문

 

 

오래오래 참으면 나도 눈부셔질까요

 

잠깐씩 깨어나

베개에 묻은 흙을 털면

나의 바탕색은 남향이었을까요

 

꽃나무 아래에서 죽은 인형은

차가운 밤이 되고

우린 매일 좋은 꿈을 나눠 먹어요

실패한 꿈은 세상에 없는 기원이 되고

반려식물처럼 길어지는 머리카락

 

아직 꿈에 봉인된 인형은

나쁜 이야기가 아닌

오히려 선몽이라고

 

아무 잘못 없는 꿈은

나에게 말하지만

 

식어가는 잠은 말수가 적어요

 

국화꽃을 던지면 말린 꿈은

생생한 잎맥이 돋아나요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하면

깊은 잠을 못 잔다고

 

남은 꿈을 심는 뿌리 없는 사람들

― 「잘못 없는 꿈」 전문

 

 

무엇이 지느러미를 흔드는가

 

아가미로 몰려오는 뾰족한 인기척

 

링거를 박차고 나와

혈관을 타고 흘러내리는

 

비늘

 

비늘에는 비밀이 많아 길 하나씩을 숨겨놓은 문이지

파도를 만져보다 알았지

 

물살이 들이닥치는 순간

간이침대 가장자리로 내쳐졌지

 

후드득, 비 맞은 토란잎처럼 미열이 맺히고

 

모두가 뛰어내리고

모두가 가라앉는 모서리라는 세상의 끝

 

그다음은 자유낙하하는

해파리의 문장으로 흐느끼고 싶었거든

 

아무도 마주치지 않는 복도를 지나

뒤꿈치를 든 기도가 빠져나간 뒤

 

보호색과 경계색 사이

누워 있던

 

빛이 들지 않는 심해의 놀란 그림자 한 마리를 흔들어

 

여기, 아직 살아있는 신경에

 

계속

 

파도

― 「병동 일지」 전문

 

 

자신의 그늘을 그려 넣는 사람들

꿈 이후의 일이었다

 

깃털을 털고 날아가는 동공은 검은색이다

 

나무 그늘에 앉아 있던 나비의 눈꺼풀 밑에서 일어난 일이라

나는 깊은 꿈은 모른다 하였다

 

누군가의 그림자가 걸어 나오는 도안 밖

 

늘 변하는 건, 빛깔의 체형

몸이 갇힌 원형, 착상된 물방울을 붓으로 쓸어버린 완성의 순간

문양 속 몇 겁의 주름진 잎들이 펼치는

격렬한 생사(生死)의 반경

 

붉은 어루러기

 

입을 다물었는데도 터지는 패턴

버린 꽃은 늘 아까워 모래에 검은 달을 베낀다

 

봉인된 후생이 윤곽 없이 허물어진다

열두 달 잔금이 새겨진 상(像)이 이파리처럼 돋아난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고 꽃잎은 선명해진 징후를 찌른다

 

주기가 끝난 검은 달은 깨져버린 거울 조각

채색이 빠져나간 몸은 텅 빈 내막이다

― 「만다라의 체형」 전문

 

 

나는 몸이 없어 살아남은 자의 기억입니다

한 자락 울음을 끌고 허공에 휘어진 새의 노래입니다

새 떼들의 엇갈린 동공 속 말라붙은 하얀 눈빛입니다

없음으로 흩날리는 깃털의 무한 숨결입니다

애타게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미처 잡지 못한 손끝이 이리 따뜻했을까요

빠져나오지 못한 오늘이 이처럼 붉었을까요

검은 눈물을 찍어 밑줄 그은

여백이 전면을 덮습니다

더 이상 흘러내리지 않는 한 조각 인광의 기억

나를 가장 아프게 껴안는 흰빛입니다

― 「섬의 하울링」 전문

 
 
시인의 말

태양

지구

그리고 나의 순서로

일식이 완성되었다

내일이 눈부시다면 그 때문일 것이다

2025년 8월 고영숙

 

 

◨ 시인의 산문엿보기

 

신화가 사라진 자리에서

 

 

신들이 자리를 비운 세상이다. 슬픈 연대는 손쉽게 부서졌다. 신은 비릿한 꿈 하나를 던져 버리고, 여자는 덥석 주워 신파를 만들고 달에 가려진 붉은 신화는 쏟아지고 물러진 하늘은 소리를 지르고, 여자는 궁금했다. 왜 높은 곳에서 하면 신화이고, 우리가 하면 신파인지, 푸른 신화에 닿지 못한 나는 영원한 신파인지...

안간힘은 잘못될수록 계속 일어서는데 예측 불허의 일기예보, 슬픔의 높이에서 여자가 아찔하게 흔들린다. 심장 가까이 관통하는 치명적인 난기류, 한 줄의 구름이 없어도 돌풍이 일고 소용돌이치는 회오리바람이다. 생의 기류를 통과할 때마다 파르르 떨리는 파동의 기록,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다 한쪽으로 쏠리는 서늘한 날개, 투명한 비행운(飛行雲), 구름의 꼬리를 잡고 여전히 관습에 매달려 여자가 허공을 읽는다. 도망치기 좋은 기도는 늘 슬그머니 넘어간다. 여자의 생에 신의 가호는 시인도 부인도 아닌 눈부신 착오이다. 신도 가끔 마음 약한 인간을 만난다. “우리 매일 밤 좋은 이야기, 좋은 꿈을 나눠 먹어요.” 사회성 없는 신을 향한 여자의 조용한 용서가 시작된다.

 

 

 

 

고영숙 시인

2020년《리토피아》로 등단하여 시집으로『나를 낳아주세요』가 있다.

2024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표지원 선정. 2025년 전국계간지대회 작품상 수상.

kys7531@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