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링거나무 아래>

시인선 101 / 이영혜 시인

25-10-21 10:52

 

이영혜 시집(시인수첩 시인선 101)

 

벼랑 끝에서 피워낸 단단한 꽃잎들

 

시인수첩에서 이영혜 시인의 신작 시집 『링거나무 아래서』 (시인수첩 시인선 101)가 출간되었다. 저자는 총 4부로 구성된 이번 시집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든 경험과 가족, 여행, 사회에 대한 성찰을 담아냈다. 시집의 표제작 「링거나무 아래서」는 저자가 췌장 낭종으로 응급 입원하여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경험에서 출발한다. “주렁주렁 오랏줄에 묶인 수형자들 / 생명줄이 포승줄 같다”는 구절은 링거줄에 매달린 환자의 모습을 통해 자유와 속박,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예리하게 포착한다. 암 환자들이 대부분인 병동에서 보낸 열흘이 넘는 시간은 시인에게 삶의 유한성과 소중함을 깨닫게 한 전환점이었다. “오 척 육신에 종신으로 세 들어 살다가 / 불현듯 퇴거 명령 떨어지면/다 비워주고 홀홀 / 알 수 없는 먼 길 떠나야겠지”(「세입자」)라는 구절에서 보듯, 시인은 몸을 빌려 사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성찰하며 겸허한 자세로 삶을 대한다. 이와 같이 시집 곳곳에는 가족에 대한 깊은 애정이 배어 있다. 십여 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삼선 슬리퍼는 여전히 “한 방향으로” 현관에 놓여 있고(「삼선 슬리퍼 한 쌍」), 치매에 걸린 어머니는 “점점 아이가 되어가”며 “우화등선을 꿈꾸고” 있다(「우화등선」). “점심은 먹었니?”를 반복하는 어머니의 밥걱정은 한국적 모성의 정수를 보여준다. “유구한 자식 밥걱정”(「밥걱정」)이라는 표현처럼, 시인은 이제 어머니의 어머니가 되어 약을 챙기고 반찬을 사 들고 간다. 멀리 유학 간 아들을 떠나보내는 아픔(「영종도」)과 성장하는 손녀를 바라보는 기쁨이 교차하며, 생과 소멸의 물지게를 양어깨에 지고 걷는 시인의 모습이 애틋하다. 이영혜 시인은 『링거나무 아래서』에 수록된 시 편들에서 개인의 내밀한 경험을 넘어 사회적 약자들에게도 시선을 돌린다. 탈북자 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의 의료봉사 경험을 담은 연작시는 특히 인상적이다. "안녕하십네까?"라며 나팔꽃처럼 환하게 인사하는 탈북 여성들(「하나원 일지 1」), 손톱마다 희망의 꽃을 피운 네일아트(「하나원 일지 2」), 십여 년을 떠돌다 한국에 온 이의 “아래 송곳니 두 개만” 남은 입(「하나원 일지 3」)은 고통의 역사를 견뎌낸 이들의 삶을 증언한다. “더 높고 더 싼 집으로 / 숨 가쁜 등정을 시작”하는 노인(「달팽이 계단 정류소」), 요금소 박스 안에서 네일아트로 미소 짓는 손톱들(「네일아트」), 코로나 팬데믹의 공포(「바이러스 월드」), 가자지구의 비극(「누구를 위하여 불꽃은 터지나」) 등 시인은 우리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다. 몽골 고비사막을 세 차례 여행하며 얻은 깨달음도 시집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끝이 없다, 경계가 없다 / 길이 없다”는 사막에서 시인은 “가고자 하는 마음이 길이다”(「고비, 길」)라는 철학적 통찰에 도달한다. 길 없는 길을 달리며 마주한 모래바람, 은하수 가득한 밤하늘, 구름 그림자는 삶의 여정에 대한 은유가 된다. 시인의 치과의사로서의 경험은 시집 곳곳에 독특한 색채를 더한다. “도화살에 난분분 꽃잎으로 쉬이 붉게 물들었고”(「살살」), “위 어금니 신경 치료도 끝나고 / 마지막으로 크라운을 씌운 날”(「하나원 일지 2」), “송곳니 두 개만 달랑 남았다”(「하나원 일지 3」) 등 구강과 치아에 관한 구체적 이미지들은 시인만의 개성 있는 언어 세계를 구축한다.『링거나무 아래서』는 4부 58편의 시와 산문 1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생로병사의 현장에서, 가족의 품에서, 사회의 그늘에, 광활한 자연 앞에서 시인이 발견한 삶의 의미들이 진솔하고 따뜻한 언어로 펼쳐진다. “맑은 정신 하나 / 바지랑대 끝에 새로 내건다”는 시인의 말처럼, 이 시집은 삶의 무게를 견디며 희망의 깃발을 올리는 한 시인의 용기 있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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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커튼 안 나뭇가지에
점점 쭈그러드는 열매들이 매달려 있다
약과 물과 죽과 피를 내려주는
가는 줄을 잡고
가는 숨을 쉬고 있다

 

주렁주렁 오랏줄에 묶인 수형자들
생명줄이 포승줄 같다
화장실도 거동도, 두려움과 고통도
옭아맨 올가미

 

저 투명한 줄처럼
자유를 결박했던 식구들이
지금 나를 지킨다

 

차갑지만 단호한
링거 나무를 부여잡고
누군가 끈질기게 복도를 걷고 있다

- 「링거나무 아래서」전문

 


한 방향으로 나란한
삼선 슬리퍼 두 켤레
죽음 한 켤레 삶 한 켤레가
엄마 집 현관을 지키고 있다

 

이제 그만 치우라고 잔소리해도
집안엔 남정네가 있는 것처럼 해야 한다
변명인지 고집인지 그리움인지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기억의 미련인지
십 년 넘게 한자리에 붙박여 있다

 

절뚝이던 다리로 15층에서 마당까지
쓰레기 들고 내려오던 저 슬리퍼
더 이상 늙지도 낡지도 않는
아빠의 자취다

 

엄마는 자꾸만 커다란 저 슬리퍼를 끌고
쓰레기 버리러 나가신다

 

아빠의 커다란 눈동자 같고 함박웃음 같은
보름달빛 백발 위에 얹고서
발 시린 줄도 모른 채

- 「삼선 슬리퍼 한 쌍」전

 

 

가파르게 올라온 강북04 마을버스에서

노인이 내린다

배낭은 축 처지고 등은 그만큼 앞으로 굽어 있다

달팽이처럼 돌지는 않고

직선으로 뻗은 계단으로

네 발 지팡이 절뚝이며 발걸음을 옮긴다

꿈을 품은 이들은

재개발 꿈의 숲 단지에서 다 내리고

노인은 더 높고 더 싼 집으로

숨 가쁜 등정을 시작한다

발아래 세상이 파노라마 뷰로 펼쳐지는

오래된 성채를 향해

천국의 계단 오르듯 한 계단씩 올라간다

북한산 영봉 위 구름 사이로 나온 저녁 햇살이

노인의 등을 슬며시 밀어준다

이제는 떨어질 일만 남은 생

그래도 올라갈 때가 좋은 거라고

축대에 만발한 능소화

저녁 바람에 흔들리며 응원하다가

하나둘씩 모가지를 꺾는다

- 「달팽이 계단 정류소」전문

 

 

새파랗게 날 선 양파의 독기에

눈 코 머리 가슴속까지 아뜩하다

은장도 날처럼 빛나는 촉

푸른 싹을 제 몸의 중심에 잉태하고

겉치마 속치마 겹겹으로 동여맨 결기를

혼신으로 뿜어대고 있다

암컷들은 온몸으로 독을 끌어모아

제 가운데 품은 싹 지켜낸다

제 살 다 내어주고 쭈그러든 저,

몸뻬 바지 속 양파는

더 이상 맵지도 못하다

장아찌 담근다고 괜스레 분주한

백발의 뿌리가 성글다

벼린 날에 찔린 듯 눈물 콧물 고인다

 

엄마의 지난날들이 진한 냄새를 풍기며

새카맣게 졸고 있다

- 「양파를 썰며」전문

 

 

하나원 첫 의료봉사 날

헐레벌떡 3층 진료소에 오른다

“안녕하십네까, 안녕하십네까?”

복도 대기 의자에 앉아 있던

십여 명의 여자들 일제히 일어서서

기역자로 허리를 굽히며

높고 낭랑한 북한식 목소리로 인사한다

겨울 햇살 빼꼼히 퍼져 들어오는

고요한 일요일 아침 텅 빈 공간에

나팔꽃 인사가 송이송이 환하게 피어난다

이렇게 힘찬 인사를 받은 적이 언제 있었나

내가 더 부끄러워 얼굴 뜨거워져

자라목 목례만 겨우 하고 서둘러 들어가는데

등 뒤가 참 오래 따뜻하다

나는 오전 내내 상한 꽃잎 속을 어루만지며

할미꽃보다 더 목과 허리 굽혀

나팔꽃 인사에 화답하였다

- 「하나원* 일지 1 -나팔꽃 인사」

  * 하나원: 탈북자 정착교육 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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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저 뭉게구름과 바람의 길은 어디로 수렴할까

나의 정처는 어디쯤일까

별과 새와 노을과 애인의 언어를

채록도 표절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또 부끄럽다

 

맑은 정신 하나

바지랑대 끝에 새로 내건다

 

2025년 10월

이영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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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산문 엿보기

 

송곳니의 힘

이영혜시는 내게 과연 무엇일까? 나는 왜, 무엇을 썼을까? 근본적이지만 쉽게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을 다시 마주하고 또 골똘해진다. 나란 축을 중심으로 풍력발전기처럼 쉬지 않고 같이 돈 날개들. 내 삶에 힘을 전달해 주고 내 시가 된 날개들을 생각해 본다. 불완전한 모순덩어리인 나, 그런 나와 동행해 온 나의 가족과 친구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 그리고 내가 몸담고 사는 변화하는 이 사회가 그 요약이리라. 나와 때로는 불화하고 때로는 화해하며 돌아가는 이 날개들에 힘입어 여기까지 왔고, 그 사이사이 피어나는 꽃처럼, 또는 절규의 일기처럼 몇 편의 시가 남았다

 

링거나무 아래서

2년여를 끌었던 코로나가 끝날 무렵, 나는 갑작스럽게 죽음의 문지방을 밟다가 돌아왔다. 소화불량, 명치 통증, 고열, 무력감 등등의 증상을 해열제와 동네 의원 방문으로 다스리다가 휴일날 집에 있던 딸이 축 늘어진 엄마를 대학병원 응급실로 데려갔다, 응급실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임시 검사소에서 코로나 검사와 온갖 검사를 받으며 반나절을 보내고 저녁이 다 돼서야 찍은 CT에 모습을 드러낸 어른 주먹보다 더 큰 검은 그림자. 췌장 꼬리 부분에 급성으로 생긴 낭종으로 나는 바로 응급 입원을 해야 했고, 다음날 진정마취 후 내시경을 통해서 위와 낭종을 연결하여 배농을 하는 배액관을 삽입했다. 그 뒤로 고농도 항생제 투약을 위해 열흘이 넘는 입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낭종이 거의 터지기 직전 발견되어 염증성 피고름이 뱃속에 퍼지는 심각한 위급 상황을 가까스로 모면한 것이다. 입원 기간 내내 맑은 수액과 하루 몇 번 투여되는 노란 항생제가 달린 링거대는 나의 분신이 되었고, 긴 줄 끝에 연결된 주삿바늘은 자주 내 핏줄을 뚫고 손목을 멍들고 붓게 했다. 핏줄로 들어간 약들은 내 몸의 염증 상태를 빠르게 없애고 나를 회복시켜 살려내고 있었지만, 나는 이 주삿바늘과 줄들로 인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 심각한 암 환자들이 항암 치료를 받으러 입원하는 병동이었기에 밤새 구역질하고 신음하는 그들과 보호자들을 보며 나는 어떤 불평불만도 사치스러워 잠 못 드는 밤마다 그저 이불을 덮어썼다. 항생제 투여 기간만 끝나면 퇴원할 나는 어쩌면 나이롱환자라 생각되었기에. 

처음엔 내 상태가 놀랍고 두려워 눈물과 기도밖에 나오지 않았으나, 차츰 몸이 회복되는 걸 느끼며 나를 다스려 갔다. 매일 찾아오는 식구들이 나를 지켜주고 있었고 옆에서 응원해 주는 벗들이 힘이 되어주었다. 저 링거줄처럼 칭칭 나를 옭아매서 나의 자유를 속박하던 가족들이 나를 살게 하고 늘 나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나의 가장 소중한 의미임을 다시금 깨닫기도 했다. 입에서 항문까지 잘 먹고 잘 배설하도록 그 외길을 다스리는 일이 쉽고도 어려운 것이 우리 삶인데, 내 몸을 내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힘은 너무나 미약하여 절로 두 손이 모아졌다. 나를 지배하는 주인에게 종신 세 들어 사는 이 초라한 오 척 단신! 비용 인상 없이 더 오래 살다가 불현듯 퇴거명령 받고 홀연히 평화롭게 떠나갈 수 있기를 빌었다.

 

 

주렁주렁 오랏줄에 묶인 수형자들

생명줄이 포승줄 같다

화장실도 거동도, 두려움과 고통도

옭아맨 올가미

 

저 투명한 줄처럼

자유를 결박했던 식구들이

지금 나를 지킨다

 

차갑지만 단호한

링거 나무를 부여잡고

누군가 끈질기게 복도를 걷고 있다

-「링거나무 아래서」 부분

 

 

 

이영혜 시인

2008년 『불교문예』 등단.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및 동 대학원 졸업. 치의학박사.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시집으로 『식물성 남자를 찾습니다』가 있다.

hident@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