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수다는 다정해서 쓸쓸해>

시인선 103 / 이미산 시인

26-01-29 13:12

 

이미산 시집(시인수첩 시인선 103)

 

일상의 틈에서 건져 올린 56편의 연대기

 

 

이미산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우리의 수다는 다정해서 쓸쓸해』 (시인수첩 시인선 103)를 출간했다. 전작으로부터 3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시집은 ‘우리’라는 관계의 본질을 탐구하는 56편의 작품을 담아냈다. ‘우리’라는 단어가 유독 많은 이번 시집은 관계와 연대를 중심축으로 삼는다. 여름 소나기가 대지를 적시듯 시편마다 스며든 ‘우리’는 단순한 복수 대명사가 아니라, 함께한 시간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려는 시인의 간절한 기도다. 시집은 일상 속 특별한 순간들을 포착하는 시인의 예리한 관찰력이 돋보인다. 「엘리베이터 문이 활짝 열리면」에서는 평범한 엘리베이터가 우주선이 된다. “나는 전송되는 동시에 전송받는 우주인”이라는 시인은 147층에서 17층으로 내려가며 층마다 달라지는 삶의 단면들을 목격한다. 마트로 향하는 일상마저 “첫눈우유, 첫눈딸기, 첫눈엄마”가 부유하는 환상적 우주로 탈바꿈한다. 특히 주목할 작품은 「당신의 고독 삽니다」는 홈쇼핑이라는 백지 앞에서 타인의 감정을 “사고 싶다”는 욕망으로 시작하여, 현대 소비문화와 인간의 근원적 외로움을 절묘하게 연결한다. 특히 “인정머리”라는 한국적 정서가 냉정한 파수꾼이면서도 “외로운 구입”을 품는 이중적 존재로 그려지며, 억압된 감정이 “자유를 찾아 도망친 뾰루지”로 변모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시인은 ‘고독의 상품화’를 통해 현대인의 정서적 빈곤을 제시한다. 「샹들리에」는 갓난아기의 주먹이 펼쳐지는 순간을 포착한다. 활짝 펼쳐진 작은 손은 “동시에 켜지는 꽃숭어리들”이 되고, 둘러선 사람들의 “오구오구” 소리와 함께 하나의 빛나는 샹들리에를 이룬다.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시적으로 형상화되며, 공동체가 서로의 빛이 되어주는 순간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이어 『우리의 수다는 다정해서 쓸쓸해』라는 표제작이 담긴 「빗금의 자세」는 관계의 불완전함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우리가 잡았던 손을 놓을 때 / 함께한 시간은 / 빗금으로 새겨졌지”라는 구절은 완벽하지 않은, 늘 한쪽으로 기울어진 채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는 인간관계의 본질을 보여준다. 1부에서 4부로 이어지는 이 시집의 구성은 한 개인의 성장 서사이자 여성의 생애사이며, 동시에 시대의 감각을 통과한 공동체의 연대기처럼 읽힌다. 유년기의 상처와 사춘기의 혼란, 사랑과 이별, 돌봄과 상실, 사회적 폭력과 역사적 비극이 시편들 사이에 유기적으로 배치된다. 특히 「전쟁미망인」, 「다뉴브강의 신발들」, 「요코하마 메리」와 같은 시편에서는 개인의 서정이 집단의 기억으로 확장되며, 시는 애도의 형식을 띠는 동시에 기록의 역할을 수행한다. 시집 말미의 산문 <겨울의 자작나무>에서 드러나는 시인의 자전적 고백은 이 시집을 관통하는 정서적 뿌리를 형성한다. 소녀와 숙녀, 수녀 대신 시인이 되기까지의 삶, 사랑과 죽음을 대면하며 형성된 윤리적 감각은 시편들 속에 과장 없이 스며 있다. 시는 개인적 체험에 머무르지 않고, 비슷한 시간을 통과해 온 독자들의 기억을 조용히 호출한다. 그래서 이 시집을 읽는 동안 독자는 종종 자신의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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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갓난아기가 움켜쥔 주먹 활짝 펼치며

눈동자 방글방글 콧구멍 발랑발랑 입술 오물오물

 

둘러선 사람들 오구오구

동시에 켜지는 꽃숭어리들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이때 주

먹은

겨울과 또 겨울 후에 피어날 꽃송이

 

자꾸 쓰다듬으면 돌멩이도 웃는다, 이 돌 속엔

한 땀씩 쌓아 올린 에피소드와 때로는 왼손을 쓰라는

엄마의 기도와 제 가슴에 잽을 날리는 변두리의 자세도

있다

 

사람들은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간다

주먹이 기다리는 샹들리에 속으로

 

실컷 울고 다시 움켜쥔 주먹이 있다

거꾸로 서기 위해 눈물로 만든 고드름처럼

- 「샹들리에」

 

 

아이가 누워 있다 바라보는 벽

 

무덤이 있다 벽을 삼키는 침묵

 

벌어진 입이 있다 한때 아이였던

한때 엄마였던

머리칼 풀어헤친 여자가 있다

여자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있다 기울어진 벽을 보며

넘어지는 벽이 있다 벽을 바라보는

 

슬픔이 있다 아이를

엄마를

여자를 전파하는

빛이 있다 심장에 이식되는 노오란

개나리 같은

 

오늘이 있다 지나간 날씨처럼

혼자 노는 아이

 

온전히 슬퍼지려는데

아이가 자란다

 

아이 뒤로 혼자 지는

개나리꽃

- 「멜랑콜리」

 

 

우리가 버린 것들의 기분을 다 모아도

저 어처구니에 닿지 못하리

 

엄마는 버려지지 않으려는 모든 고집을 모아

아이를 끌어안았으니

 

남겨진 신발의 용도란

소용없는 것들의 기분

 

역사를 일으켜 세우는 기록이 있고

발바닥에 숨긴 진실도 있지만

 

신발은 사실적인 이별을 예감하진 못한다

용서 없이 멈춰버린 심장처럼

 

이정표가 지워지면 처음을 가리키는 구두코

몸이 사라져도 중심을 기억하는 뒤축

 

꿈인 듯 농담인 듯

사라진 발을 찾는 신발들의 아우성

 

끌어안은 발자국 지워질까

강물은 영영 잠들지 못한다

- 「다뉴브강의 신발들*」

 

 

여기는 적막한 내부

아직 판매되지 않은 미래의 놀이

 

상자는 부드럽게 나아간다

우주선처럼

 

나는 전송되는 동시에 전송받는 우주인

 

첫눈은 잠깐 내리다 그쳤다 곧 마트 가판대에 눈송이가 전시될 것이다 눈송이로 만든 밥, 눈송이로 키운 과일, 한입 깨물면 온몸으로 번지는 첫눈의 감각, 한숨 자고 나면 훌쩍 자란 아이처럼 컨디션을 회복한 지구가 달의 손을 잡는 날까지

 

마트는 끝까지 살아남아

 

냉장고가 비었네 마트에 가야지 중얼거림이 상자의 실핏줄에 닿아 덜컹! 상자 밖의 상자를 깨워 웅웅웅! 메시지와 함께 나는 우주 속으로 훨훨

 

147층 77층 17층…… 이곳의 풍경은 층마다 달라

벽과 벽, 불빛과 불빛, CCTV와 CCTV, 찰칵 또 찰칵

 

눈송이처럼 우주를 떠다니는 첫눈우유, 첫눈딸기, 첫

눈엄마, 첫사랑, 첫…… 딩동!

문이 열리면 잠의 세계로 떨어지는 나의 우주선, 여기

한 생을 남겨두고

 

폴짝!

 

나는 상자 밖으로 나와 / 마트로 향한다

- 「엘리베이터 문이 활짝 열리면」

 

 

함부로 깨물거나 천천히 녹이거나

당신의 취향이면 좋겠습니다

 

공글리고 희롱하다 단박에 삼켜도

당신으로 피어나니 다행입니다

 

모르는 사람이여

오늘은 심심하고 내일은 궁금한가요

 

내가 있잖아요

버려지고 구겨져도 애인처럼 바스락거리는

 

심야의 환한 편의점

변신을 기다리며 가지런히 배열된

 

나는 과자예요

- 「나는 과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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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시들을 정리하다 보니

우리, 라는 단어가 유독 많았다.

어쩌랴, 내게 뿌리내린

수많은 우리를.

함께한 시간이 다만

우리의,

우리에 의한,

우리를 위한,

아름다움으로 남겨지길.

 

2026년 1월 이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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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산문 엿보기

 

겨울의 자작나무

  

수녀

 

나는 가톨릭 재단의 여고를 다녔다. 교장 선생님을 비롯해 수녀님들이 많이 재직하고 계셨다. 교화는 백합, 교훈은 양심, 교훈의 실천으로 모든 시험은 삼 년 내내 무감독

고사를 치렀다.

순박한 소녀에게 태어나 처음 본 수녀님은 성스러움 그 자체였다. 나도 수녀가 되기로 했다. 첫걸음으로 매주 열리는 성경반에 가입했다. 나처럼 상기된 여학생들이 많았다. 아무튼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성경을 공부했던 것 같다. 그러나 신자가 되지는 못했다. 성당에서 영세를 주는 행사는 방학이 시작되고도 며칠을 기다려야 하는 성탄절이었다. 나는 부모님 정에 굶주렸으므로 방학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고 곧바로 고향으로 달려가야 했다. 수녀가 되는 꿈보다 따뜻한 품이 급했으므로 썰렁한 자취방에 남아있는 건 무리였을 것이다. 어쩌면 신앙이 무엇인지 몰랐을 수도 있다. 그렇게 삼 년 동안 세 번의 기회를 모두 놓쳤다. 졸업 후에도, 아니 지금도 기회는 있지만, 너무 뜨거운 열망이란 오래 지속되지 않는 것일까. 사회로 나온 후 나는 순수에서 세속의 세계로 나도 모르게 밀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가슴 한 켠에 아쉬움은 남아 있다.

 

딸아, 꼭 그길로 가야겠니

 

그러니 돌아보면 안 되었지

꼿꼿하게 걸어간 수도원

 

때때로 흔들렸지만

흔들리지 않고서 강해질 수 없기에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늘로 향하는 가느다란 몸

창백은 푸르러 오월을 낳았고

 

넘치는 봄과 가진 적 없는 봄날 사이

쏟아지는 햇빛

 

순백 사이사이 수줍은 분홍은

세속을 벌충하듯 설렘이 넘쳐

 

누구를 향한 부케였을까

 

혼자 치르는 혼례 같은

한 여자가 피었다 가네

- 「달래꽃을 만나는 어떤 방식」 전문

 

수녀 대신 시인이 되었으니 아주 서운하다곤 할 수 없겠다. 한 시절 나를 관통했던 성직에 대한 동경은 내 안에 문신처럼 남아있을 것이다. 순수를 추구했던 사고는 자칫 고지식함으로 발전하는 것일까, 나의 빛나던 순수는 훗날 시를 습작하는 내내 방해가 되었다. 사람이나 사물의 내면을 보는 시선이 일상적이며 세속적일 수가 없었다. 완성되지 못한 순수는 왜곡되는 것일까.

사고의 전환을 위해서는 여러 분야의 독서가 필요했다. 나는 문화 행사를 찾아다니거나 일부러 야한 영화와 소설을 접하기도 했다. 예술과 자유의 상관관계에 대략 공감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고백한다. 천성적인 데다 자발적으로 덮어쓴 질긴 가죽을 벗겨내는 일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미산 시인

2006년 《현대시》 등단

시집으로 『아홉시 뉴스가있는 풍경』 『저기, 분홍』등

〈시와문화 작품상〉을 수상했다.

wy12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