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내 한 점>

홍신선 시인

26-08-14 14:57

 

향내 한 점

 

홍신선 시집

 

 

★책 소개★

 

[향내 한 점]은 홍신선 시인의 열두 번째 신작 시집으로, 「삶이 위대한 것을」 「찬 꽃 한 채」 「벚꽃 엔딩」 등 56편이 실려 있다. 홍신선 시인은 1944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으며, 1965년 [시문학] 추천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서벽당집] [겨울섬] [삶, 거듭 살아도](선집) [우리 이웃 사람들] [다시 고향에서] [황사 바람 속에서] [자화상을 위하여] [우연을 점찍다] [홍신선 시 전집] [마음經](연작시집) [삶의 옹이] [사람이 사람에게](선집) [직박구리의 봄노래] [가을 근방 가재골] [향내 한 점], 산문집 [실과 바늘의 악장](공저) [품 안으로 날아드는 새는 잡지 않는다] [사랑이란 이름의 느티나무] [말의 결 삶의 결] [장광설과 후박나무 가족], 비평에세이집 [하프를 잃은 시인들], 저서 [현실과 언어] [우리 문학의 논쟁사] [상상력과 현실] [한국 근대문학 이론의 연구] [한국시의 논리] [한국시와 불교적 상상력]을 썼다. 서울예술대학, 안동대학교, 수원대학교, 동국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녹원문학상,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 현대불교문학상, 김달진문학상, 김삿갓문학상, 노작문학상, 문덕수문학상, 이형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홍신선 시인은 1961년에 등단했다. 그러니 이번에 펴내는 시인의 열두 번째 신작 시집 [향내 한 점]은 65년의 시력을 헤아리는 셈이다. 물론 1960년대에 등단해 여전히 시를 발표하고 시집을 펴내는 시인들이 없지는 않지만, 홍신선 시인만큼 시와 삶에 두루 염결하고 자신의 시 세계를 흐트러짐 없이 견결하게 유지하고 있는 시인은 단언컨대 드물다. 이번에 홍신선 시인이 발간한 [향내 한 점] 또한 간결하고 옹찬 필세로 생과 사를 겸해 다독이고 아우르는 도저한 깊이를 보여 준다. 특히 홍신선 시인이 마침내 다다른 심경이라 이를 만한 “수백 톤 적막이 수몰”된 “물 깊은 연못 하나”는 자못 장엄하고 아연하기까지 한데(「시간 속에도 거울이」), 더욱 그러한 까닭은 [향내 한 점]에 실린 시편들 모두가 이런저런 시적 조사(措辭)를 훌훌 털어 버리고 시인이 귀촌해 정착한 가재골의 곳곳에서 몸소 경작한 바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향내 한 점] 이전에 상재한 또 다른 가재골 시편들이랄 수 있을 [직박구리의 봄노래](2018)나 [가을 근방 가재골](2022)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 바이지만, 이번 [향내 한 점]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말하자면 [향내 한 점]에 등장하는 가재골은 시인이 직접 땀을 흘려 경가하면서 나날을 도모하는 곳이자 도처에 깃든 죽음을 끌어당겨 감싸안고 달래는 곳이기도 하다. 그곳은 요컨대 갖은 생멸의 현장이자, ‘따시한 향내 한 점’으로 족한(「향내 한 점」) ‘으늑한 절집 한 채’다(「찬 꽃 한 채」). 홍신선 시인이 적었듯 “삶이 거대한 것”은 “그날그날이 이 자잘한 것들 덕분”이라는 말은(「삶이 위대한 것을」) 곧 저 소소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생명들 하나하나가 견디고 버틴 그 하루하루가 종국엔 더할 수 없이 위대하다는 뜻으로 새겨야 할 것이다. “막장 끝판다워/더 아름답게 저무는 봄날”이다(「벚꽃 엔딩」)

 

 

 

★시인의 말★

 

시를 따라나선 지 햇수로 60여 년, 그동안 나는 줄곧 내 얘기들을 해 왔다. 시는 장차 나를 또 어디로 무슨 얘기 속으로 끌고 갈 것인지. 그런데 이제 서서히 깃발을 내릴 때가 오는 것 같다.

종착의 여기까지 나를 이르게 한 많은 이들과 모든 것에 두루 무한 감사한다.

2026년 이른 여름에


홍신선

 

 

◨ 책속에서

 

삶이 위대한 것을

신새벽부터 뒷산 골짜기를 통째 등에 지고
울며 다니는 꾀꼬리
무엇이 저를 저리 내모는가.

학교 문턱에는 아예 들어선 적 없어
배움이 없던 아버지는 자식들 학비 조달에 쪼들려
왼 생을 탕진했지
오늘 해외직구로 받아 든 약병을 들여다보며
영문을 더듬더듬 읽던 나는 문득 당신의 수고에 소름 돋았다.

터앝 밭이랑에 한참 전 묻어 둔 종자가 싹을 틔워 올라올 때
하루 일 마치고 모처럼 땀 들이며 그늘에서 쉴 때
해 막 진 뒤 땅거미 전까지 환한 박명 속에 앉아 멍때릴 때

그날그날이 이 자잘한 것들 덕분이란
문득 든 터득에
나는 그저 턱없이 고마운 것을
삶이 거대한 것을…… ■

 


찬 꽃 한 채


간밤 내 누가 와 달그럭대며 문고리를 땄는가.
새벽녘 한기에도
빗장 풀고 꽃부리 활짝 열어젖힌 매화 한 송이.
거기 저 안쪽 내당에선 정근(情勤)이라도 하는지
간밤 내내 흘러나왔노니
뮤즈여 뮤즈여 시의 딸이여
명호 되뇌어 읊는 소리.

이제 나는 저 시린 찬 꽃으로
으늑한 여기 절집이나 한 채 지어 두고 가려 한다.

*절집 한 채: 서정주의 시 「가벼이」에서 가져왔음. ■

 


벚꽃 엔딩

한 사흘 왁자지껄 난장판이더니
무슨 즐거움들인가
까르르 까르르……
더러는 스크럼 짜 서로 붙안고 더러는 제각각 입 가리고 키들대더니
저 경쾌한 웃음소리 허공 너머로 사라진다.
까르르 까르르……
가물가물 뒤태를 보이며
바람의 목덜미를 꼭 붙안고 가는 축도 있다.
그러다 문득
일시에 네 가닥 꽃잎을 짜갠
일시에 만발한 벚꽃들이
폭파당한 건물 내려앉듯 그 자리에
뭉글뭉글 흙먼지 아닌 자욱한 낙화가 되어 솟구쳐 날아오른다.
보아라 봐
마치 종언이란 이렇다는 듯 이거 보라는 듯
왕벚나무 우듬지로부터
눈부신 부실 덩어리 한 동 건물이
때아닌 초강풍에 붕괴하고 있다.
막장 끝판다워
더 아름답게 저무는 봄날. ■

 

 

주영중 (시인)
: 뭇 생명들이 살아온 위대한 시간과 생이 다하고 흘러갈 다음 세상에 대해 생각한다. [향내 한 점]은 죽음에 대한 비애의 표상을, 아프게 아름다웠던 생의 궤적을 현시한다. 영겁회귀하는 만상의 흐름을 계시한다. 생의 끝자락을 노래하는 시인의 시가 때로 아프게 진동한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는 “맹목의 푸른 절규”가(「바랭이풀」), “막장 끝판다워/더 아름답게 저무는” 벚꽃의 종언이(「벚꽃 엔딩」) 뭉클하게 몸을 훑고 지나간다. 삶과 죽음에 대한 서늘한 증언에는 즉자적 진경과 자유로운 상상이 거침없이 물결친다. “이제 그만 너덜너덜해진 옷은 벗어 버리고” “물이나 바람 한 줄기 기(氣)로 되돌아가/건곤을 자유로이 누비”고자 하는 소망에도 그러한 모습이 잘 드러난다(「와병이 깊고 보니」). 그러고 보면 죽음 이후에 펼쳐질 상상의 장면들은 역설적이게도 장쾌하고 역동적이며 활달하다. 죽음은 저 “십만억 평 광활한 하늘”로의 도약이므로, ‘대동’ 세계로의 진입이므로 슬퍼할 건 없으리. 한 생의 소멸은 결국 “일망무제 다음 세상”으로 나아가 “수수만 분해된 원자들로” 떠도는 과정이자 끝없이 몸을 바꾸는 과정이기에.(「끈」) 그리하여 여기 무한히 열린 ‘으늑한 절집 한 채’ 지어진다(「찬 꽃 한 채」). 그 속에서는 세속의 집착에서 벗어난 자유가, 영겁회귀의 시간이, 생의 열락과 허무, 생에의 긍정이 뒤섞인 채 무한 흘러간다.

 

 

홍신선

1944년 경기도 화성 출생. 1965년 《시문학》 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집 『서벽당집』 『겨울섬』 『삶의 옹이』 『향내 한 점』 등을 펴냈으며, 여러 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현대문학상, 노작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