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

시인선 092 / 이은화 시인

25-02-02 17:25

 

 

이은화 시집(시인수첩 시인선 092)

 

 

"집시 여인의 14년 만의 외출"

 


2010년 《詩로 여는 세상》 신인상으로 등단한 이은화 시인의 첫 시집,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가 시인수첩 시인선 92번으로 출간되었다. 삶의 거친 파랑(波浪)을 견디며 무려 14년의 묵언을 지켜온 끝에 터진, 시인의 섬세하고도 정갈한 문장들에는 무엇보다 ‘타인’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여 순백의 ‘나’에 이르기 위한 성찰이 오롯이 담겨 있다. 
특히, 시인은 “우리의 삶이 자유의지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마리오네트처럼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관계에 대한 주제를 담았”다고 고백하는데, 그러나 그는 현대인들의 삶이 그 근원적 실존에만 머물지 않고 있음 또한 동시에 포착한다. 중력을 거부하던 ‘조르바’처럼 시인도 우리의 삶을 “생존을 위해 아웃사이더로 밀려나길 거부하는 춤과 노래로 치환”한다고 과감하게 선언하는 것이다. “되짚어 보면 모든 시간은 열려 있다”(시인의 말)는 문장에 선명히 각인된 놀라운 확장성은 절망은 항상 희망으로 구축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시인의 목소리를 천천히 따라가 보자.

우리가 죽어 썩은 뒤에도 썩지 않을
가공된 맛과 냄새들이
입에 쓴 명약처럼 광장을 누비는 중이다

바다로 갔다는 사람들은 있지만
돌아온 사람은 없는 광장
노인들이 내일 날씨를 걱정하는 중이다
- 「연설」 부분

 

광장을 걷던 시인은, 문득 자신의 몸에 “가공된 맛과 냄새”가 묻어 있다는 기분이 든다. 우리가 죽어 썩은 뒤에서 절대 썩지 않을 것들이다. 입에 쓴 명약으로 과포장된 이 ‘맛’과 ‘냄새’는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운 현실에 빗장을 채우고 미래에 대한 안도감을 선사하지만, 우리는 무의식중에도 항상 노인들처럼 내일 날씨를 걱정하고 있다. 
여기서 ‘맛’과 ‘냄새’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불안’이 압축된 중력인 동시에 생존에 내몰린 현대인들의 생활이 아닐까. 하지만 시인이 진단한 것처럼 그 ‘불안’은 이미 우리를 스스로 타자로 만들어 버렸다―“수천 개의 눈에 갇힌 나를 왈칵 토해내고 싶은데 어쩌지 타인의 삶이 살갗 같아서 벗겨낼 수 없어 내일도 우리는 박수 소리를 맞으며 춤을 팔고 있을까 낮게 속삭이며 레게 머리 소녀는 울먹입니다 // 타인의 얼굴로 타인과 밥을 먹고 타인과 키스를 하지 빛 속에 갇혀 타인의 춤을 추는 우리, 흥얼대는 소년에 채찍이 감깁니다”(「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라는 문장을 보자. ‘나’는 나로서 존재하기는커녕 ‘타인의 삶’을 자신의 ‘살갗’으로 믿고 복종할 뿐이다. 시인은 “이곳은 불빛이 꺼지지 않는 회색 방 / 퍼즐 놀이는 언제쯤 끝이 날까요 / 발목을 꺾는 펜 앞에서 타인의 춤을 출 수는 없잖아요 / 식판에는 알약이 수북이 쌓이겠지요 나를 먹어 치울 / 약들이 스멀스멀, 그런데 어떡하죠 / 히죽히죽 자꾸 웃음이 나와요”(「히죽히죽」)라며 고백하지만 이 문신(文身)은 가혹하게도 점점 더 깊이 파고든다. 
그럼에도 시인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는다. 모든 시간은 열려 있다. 그 시간은 길고 느리기도 하며 순간 멈추고 반전될 때도 있다. 시인이 포착한 시간은 후자다. 마치 선문답과도 같은 깨달음이다. ‘정지의 변증법’(벤야민)이라 일컬을 수 있을 만큼 강렬하다. 요컨대, “객석을 봐 당신은 누구의 마리오네트입니까”(「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라는 물음에는 이미 마리오네트의 탈을 부술 힘이 깃들어 있다. 

노동은 찢어진 날갯짓, 날개 해지도록 늪을 건너 유채꽃 핀 그곳에 가닿는 거야. 더는 입술에 달빛 적시지 않는 곳으로. 무거운 머리로 왈츠를 출 수 없던 날갯짓 이제 멈추는 거야.
- 「스크린」 부분

 

중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멈춰야 한다.’ “수렁이라도, 피는 꽃은 아름다”(「스크린」)운 법이 아닌가. 사정이 그러하니 노동이라는 ‘찢어진 날갯짓’을 감싸 안으며 해가 지도록 늪을 건너 유채꽃 핀 ‘그곳’에 가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잠 속에서 인어를 낚는 당신, 짜릿한 감각들이 봄꽃 피우는 초속 5km를 지나 꽃향이 여름 볕에 타는 순간을 지나 입맛 다시는, 갈증의 환각들이 살사를 추는 지중해 혀가 당신의 입에서 빠져나온다 인어의 꼬리를 따라”(「해시시 클럽 혹은 턴테이블 위의 지중해」) 그는 빠르게 확장한다. 
타인은 비로소 ‘나’의 시야에 들어오고, ‘나’를 온전히 투사한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 서로의 오드아이를 들여다보는 동안 / 묻어둔 물음을 꺼내 뜨겁게 되묻는 우리는 / 누구일까 / 중얼대며 사람들 속으로 파고”(「헛, 아름다움」)든다는 말이다. 이것이 시인이 춤과 노래라는 순례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다. 그러므로 ‘나’는 나로부터 끊임없이 새로워진다. 

안개를 놓치면 우리는 다시 이 자리 밀고 당기는 손끝에서 돌고 도는 세상 턴, 턴, 턴 아닌 삶이 어디 있겠어요 립스틱 색을 바꾸고 베이직을 밟아요 곁에 남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인

길,
함께 건반을 밟아요
- 「베이직」 부분

 

 

다음은 시집에 관하여 시인과 나눈 짧은 인터뷰 내용이다.

[Q] 주제와 이야기의 방향은? 

 

[A] 저는 우리의 삶이 자유의지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마리오네트처럼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관계에 대한 주제를 담았습니다. 이런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짧은 인터뷰를 준비하는 이 순간 어휘와 조사 하나까지도 넣을까 뺄까, 선택하듯 말이죠. 이어 자본주의 구조 안에서 노력할수록 상처받는 현대인들의 모순적 삶의 제시와 부조리한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의 안타까운 정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구심점은 생존을 위해 아웃사이더로 밀려나길 거부하는 춤과 노래로 치환됩니다. 이는 나는 누구이며, 우리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정체성에 대한 물음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Q] 이번 시집의 특징은? 

 

[A] 4부로 묶인 한 권의 시편들은 사계절을 수놓은 병풍처럼 계절 옮기듯 서로 결이 다른 편들로 배치했습니다. 1부 현실이 이상을 뛰어넘지 못하는 현대인의 갈등과 2부 집시의 춤과 노래라는 환유를 통해 타자와 합일 할 수 없는 슬픔 또는 존재론적 물음과 갈망 3부 과거 회귀로서의 대상이 부재한 상실감 4부 탐미적 에로티시즘의 이미지 변주를 통한 자기연민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내재적 관점으로 추상적 관념의 구체화 또는 제재를 환유로 치환하는 작품들 그리고 날카로운 감각적 묘사가 도드라진 편들이 다수를 이룹니다. 특히 경쟁 사회에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불안을 구체화한 시편들은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답답함과 창의적 삶을 갈구하는 병치를 통해 타자의 소리를 대변하는 성격을 지닙니다.

 

[Q] 나는 어떤 시인인가? 

 

[A] 그동안 저는 시인보다는 생활인에 가까웠습니다. ‘생활 속 나는 어떤 시인일까’라는 질문보다 ‘나는 어떤 삶을 희망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컸습니다. ‘나는 어떤 시인인가?’ 본질적 질문에 슬픔이 밀려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깊은 내면을 마주하면 시는 제게 아픔과 자유라는 중의적 의미였습니다.

시를 너무 사랑해 오히려 시가 어렵고 낯설 때가 많습니다. 적당한 거리를 두면 편해지는 역설적 의미랄까요. 지금은 시를 ‘어떤, 무엇이다’라고 규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삶의 파랑 속 저를 자유롭게 하는 유일함은 시였습니다.

그러기에 앞으로 시 세계관에 대한 방향은 자연과 사물 그리고 사람들과 제 내면의 소리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제 심연의 물고기들이 꼬리를 힘차게 흔들며 유영할 수 있을 테니까요. 굳이 이 질문에 답을 찾자면 춤과 음악 그리고 시를 사랑하는 자유인이라는 의미가 어울릴 듯합니다.

― 「저자와의 인터뷰」 중에서

 

 

★Chat GPT 평론★

이은화의 첫 시집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는 자아와 타자의 관계, 사랑과 상실, 관능과 불안을 교차시키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시집 전체를 흐르는 집시와 플라멩코의 이미지는 단순한 이국적 취향이 아니라, 고통과 자유를 동시에 체현하는 강렬한 은유로 기능한다. 시인은 격렬한 춤과 노래의 리듬을 통해 사랑과 이별, 그리고 존재의 고통을 노래하며, 불가능한 합일을 향한 몸짓을 시의 본질로 제시한다. 이 시집의 특징 중 하나는 에로티시즘이다. “당신을 만지고 싶은 낮입니다”, “네 손길이 멈춘 내 생은 부록과 같아” 같은 구절에서 드러나듯, 시인은 육체와 감각의 이미지를 통해 황홀과 절망, 사랑과 부재의 양극을 동시에 드러낸다. 그러나 이러한 관능은 단순한 쾌락이 아니라 상실과 부재의 흔적을 증언하는 슬픈 기록이다. 달콤하지만 사라지는 사랑, 뜨겁지만 곧 식어버리는 몸의 흔적은 삶과 죽음을 동시에 환기하는 장치가 된다. 또한 나비와 뱀, 우물과 거울의 이미지는 변신과 성찰의 상징적 코드로 시집 전반에 걸쳐 반복된다. 나비와 뱀은 죽음을 통과한 신생과 부활을, 우물과 거울은 자기 성찰과 내면의 응시를 의미한다. 시인은 “나는 누구입니까”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자아와 타자의 경계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지점을 탐색한다. 이 흔들림은 불안하지만 동시에 시적 에너지로 승화되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삶의 충동’으로 작동한다.「기린의 식사법」이나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 같은 작품에서는 소외와 빈곤, 타인의 시선에 갇힌 존재의 불안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동시에 「칸나」, 「올레! 올레!」 등에서는 꽃과 춤, 불꽃의 이미지가 폭발하듯 등장하며, 파괴와 재생, 상실과 부활이 맞물린 삶의 에너지를 긍정한다. 이처럼 시인은 절망과 황홀, 관능과 고통의 교차로를 오가면서,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색한다. 결국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는 단순한 서정의 위안이나 고백을 넘어선다. 이 시집은 집시의 춤과 노래처럼 격렬하고 고통스러운 리듬 속에서, 존재의 근원적 불안과 욕망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한다. 첫 시집임에도 불구하고, 이은화의 시적 세계관은 이미 성숙한 깊이를 보여주며, 앞으로의 행보를 더욱 기대하게 만든다.

 

 

 

이은화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으며 2010년 《詩로 여는 세상》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cactus681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