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허형만 - 2025년 가을호
2025-08-11여행
허형만
여행은 단순히 길을 간다는 게 아니지.
길이란 이미 누군가 앞에 갔다는 것.
선지자든 순례자든 눈보라든 폭우든
앞서가면서 길 아닌 길을 다듬었던 것.
그때부터 길가엔 풀숲이 꿈틀거리고
돌멩이가 몸을 움츠리며 지켜보았다는 것.
그때부터 우연히 시인이라는 이름의 발자국이
길 위에 새겨질 때마다 길은 환호했으리라.
길섶에선 풀과 풀이, 꽃과 꽃이 향기를 피우고
길 위로 안개와 달밤이 촉촉하게 깔리고
저 멀리 사람 사는 곳에서 불빛이 반짝이면
시인은 콩닥콩닥 가슴으로 바람결을 몸에 걸쳤으리라.
그러니 여행이란 무작정 길을 간다는 게 아니다.
길 안에 길이 있으니 그 길을 찾아간다는 거다.
시간을 지나 신선한 풍경을 찾아간다는 거다.
새로운 감각의 진정한 나를 만나러 간다는 거다.
그러니 가보지 않은 길은 두렵지. 아니 설레지.
두려움과 설렘은 길 안의 길을 황홀하게 하지.
허형만 시인
1945년 전남 순천 출생. 1973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 『영혼의 눈』 『황홀』 『바람칼』 『만났다』 등.
중국어 시집 ????許炯万詩賞析』, 일본어 시집 『耳な葬る』.
한국시인협회상, 영랑시문학상, 편운문학상, 공초문학상 등 수상. 한국가톨릭문인협회 이사장 역임.
현재 국립목포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