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향계, 폭설의 계절을 앓다
함기석 - 2026년 봄호
2026-01-31풍향계, 폭설의 계절을 앓다
함기석
Vertex A
게우는 눈이다 새끼 잃은 암말의 커다란 눈동자 닮은
뱀이 휘날리는 숲에 살았다
나의 심복 어휘들은
내가 잠든 사이 내 배에 칼을 꽂았다 웃는 거머리들
벼랑 위 공중에 나무들이 바위들이 거꾸로 박혀 있다
그 밑으로
그 밑으로
나의 체온은 좌변을 따라 빠르게 내려가고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가 행이 바뀌고 피가 타는 미치광이 광시곡 악보
겨울밤이다 태고의 지층 속에서
층층 압착되어 수평의 문장이 되어가는 흙과 먼지와 나뭇잎
눈 감은 네가
무참히 죽어 영원히 죽지 못할 새싹 눈을 뜨는 너희가
게우는 눈이다 겨우내 나는 암말의 눈동자가 곁에서 우는
뱀이 휘날리는 숲이 살았다
Vertex B
물소리
물소리
점점 해저로 가라앉는 배, 지옥에도 이렇게 예쁜 눈이 내리다니
숨비소리
숨비소리
게우는 눈이다 터지는 눈이다 창자가 터지는 눈이다
천지가 눈의 잔혹극 극장이다
눈꺼풀을 도난당한 이 무서운 세계, 더 무서운 망각의 지층 속으로
그 밑으로
그 밑으로
밤새 살아 숨 쉬고 있다 밤은, 눈 먼 자들의 눈 먼 시계를 잠재우며
감기는 눈, 휘감기는 눈, 바깥 눈, 바깥 세계의 눈
우리의 망실된 잠 속으로
밑변을 따라 신의 눈동자, 그의 창조차 퍼렇게 깨져 있고
턱과 오금도 깨져 점점이 흩날리는데
뱀이 휘파람부는 숲에서 어휘들이
나의 눈망울 둥지로 옮겨와 회백색 까마귀 떼 날리고 있다
Vertex C
지구와 달
하나는 문장의 묵(黙) 하나는 여백의 경(經)
방파제를 굴러다니는 한 쌍의 눈알
신이 어린 바다를 알몸으로 눕혀놓고 때를 미는 날이다
스륵스륵 한 꺼풀씩 밀려나오는 파도
도형의 계절이다 오늘 신의 직업은 인간, 그도 일용직 노동자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가며 행이 밀리고 때가 밀리는 이 더러운 잔혹극 무대에서
누가 백안(白眼)을 빼 나의 흑지(黑紙)에 풀어놓고 있다
아 거긴 숨찬 놀이터 묘지인데
숨비소리
숨비소리
우변을 따라 잠 없는 꿈이 수갑처럼 흐르고 천지는 배반의 연적
게우는 눈이다 타는 눈이다 폐가 바닥까지 타들어가는 눈이다
창밖으로 두 손을 펼치자
손끝마다 초록 피가 싹터 새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가고

함기석 시인
1992년 「작가세계」등단.
시집:『국어선생은 달팽이』,『착란의 돌』,『뽈랑 공원』,『오렌지 기하학』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디자인하우스 센텐스』,『음시』,『모든 꽃은 예언이다』,『개안수술집도록』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