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의 궤도

이재훈 - 2026년 여름호

2026-06-10

  서랍의 궤도 

 

 

 

  이재훈

 

 

 

  창백한 골목길을 걷는다.

  무릎은 살짝 허리는 툴툴.

  어스름의 빌라들은 아프다.

  공복의 가옥들을 지나고

  전투에 지친 비둘기들이

  노란 그림자를 따라온다.

  전화가 걸려 온다.

  주름진 콘크리트 속으로

  빚쟁이의 말들을 내다 버린다.

  생활에 도망은 없다.

  아이처럼 떼쓸 수는 없다.

  입장차이라는 것이 있을 뿐.

  골목이 멈추는 곳은 소음도 멈춘다.

  닫힌 방에는 화석이 즐비하다.

  카프카의 방. 카프카의 독서실.

  문틈을 막고 서서 책장으로 줄지어

  걸어가는 먼지의 시체.

  옷을 벗고 맨몸에 달라붙은

  치욕과 후회와 그리움을 긁어낸다.

  단단한 고요가 찾아오면

  시집의 글자를 매만지던 손끝으로

  심장 박동을 달랜다.

  가장 오래된 기억과 만나기 위해

  가장 싱싱한 이미지와 만나기 위해

  현실과 환상을 오고 간다.

  처음으로 무릎을 드러내는 나무의 몸.

  서랍을 열고 풀려나오는 문장을 감는다.

  믿음은 품격이 있다.

  숨죽인 나무의 피부 속에서

  조금씩 돋아나는 어둡고 따뜻한

  한 마디의 기척.

  탐욕스러운 문장을 들고 비 오는 흙길을 걷는다.

  보이지 않는 손이 어깨를 두드린다.

 

 

 

 

 

   

  이재훈 시인

  1998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명왕성 되다, 벌레 신화, 생물학적인 눈물, 돌이 천둥이다.

  저서로 현대시와 허무의식, 딜레마의 시학, 부재의 수사학, 징후와 잉여, 환상과 토포필리아.

  에세이집 그리워하는 직업을 가졌을 뿐인데요, 대담집 나는 시인이다가 있다.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현대시작품상, 한국서정시문학상, 김만중문학상, 박인환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