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오는 것들, 다가오는 것들

권현형 - 2026년 겨울호

2026-10-12

  되돌아오는 것들, 다가오는 것들

 

 

 

  권현형

 

 

 

  1896년 원고지에 써 보냈던 편지가 살아 돌아왔다

  손 글씨 위로 잉크를 머금은 키 큰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사슴 숲 그런 말의 뿔에서 머스크 향기가 살아났다

  만나서 다행이라는 감정이 살아났다

  사람과 사물이 만나는 일을 운명론으로 익히던

 

  나의 가을 발밑에 떨어진 세상 모든 낙엽이 아깝고 가여워

  코팅해서 책갈피로 쓰던 고전적인 마음이 편지와 함께 돌아왔다

  몇 백 년 동안 바스라지지 않고 생환했다

 

  함께 새를 살려준 기억이 아득한 행간에 얼룩져 있다

  버스 손잡이를 잡고 있던 내 손목의 맥박을 자주 재며

  살아 있는 거지? 그렇게 묻곤 하던 장난기 가득한 눈빛

  우연히 임당동 골목을 지나갈 때,

  그 골목을 빠져나온 지 오래되었는데,

 

  공기를 나무냄새를 흙냄새를 몸이 기억하고 있다

  나무가 많았던 집 근처를 신경 줄기들이 알아챘다

  다쳐 날지 못하는 새의 다리에 발라주느라

  약국에서 연고를 사며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 집 나무 위에 새의 불안을 올려 둔 기억이

 

  낙엽 묻은 맨발 그대로

  릴케의 전집 속 문장처럼 되돌아왔다

  흠결 없는 가을을 순수를 상처투성이 손으로 돌려받았다


  인간은 골목이야

  골목을 떠돌다 빠져나가서 이윽고 사라지지

  영원히 사라질 삶의 눈빛들*

 

  사라질 땐 사라지더라도 사랑이 끝나도

  1986년에 쓴 편지를 1896년에 쓴 편지처럼

  되돌려받게 될 때가 있다 처음과 끝이 없는 것처럼

  우주 끝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티베트 종소리처럼

 

  *릴케

 

 

 

 

 

  

  권현형 시인

  1995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 :『포옹의 방식』 『아마도 빛은 위로』등.

  수상 : <미네르바 작품상>, <난설헌시문학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