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목서

고명자 - 2023년 겨울호

2025-03-01

 

 

 

 

은목서

 

 

고명자

 

 

 

새끼손톱보다 자잘한 생채기들이

생살 한그루 다 후벼 파먹고 피어나

 

은목서 향기는 낮밤을 가리지 않아

슬픔과 기쁨을 같은 가지에서 피워 올리다니

가혹하기도 하지

만약 그리움이 자작자작 부풀어 꽃의 봉분만큼 눈부시다면

퀭한 눈동자로 온 세상을 헤매겠지

 

한 여자가 지는 해를 안고 걸어가는 걸 분명 봤는데

남은 체온인양 그림자가 잠깐 반짝였는데

착각이었을까, 저녁 빛에 반사되어 날아든 향기였을까

 

누가 자꾸 모르는 이름을 불러대나

빗나가고 뒤섞이다 수백 번 더 엉클어진 눈빛이어서

대문간 식은 밥알같이, 응달의 싸락눈같이, 눈먼 날파리들같이

희끗희끗 가라앉은 응어리들

은목서 향기로 어질어질한 늦가을 저녁

노을 없이 열두 겹 어둠이 덮치고

생채기에서 슬픔이 흘러나와 느릿느릿 밤의 만 리를 가네

길 위로 위태롭게 남은 사람이어서 아름다웠네

 

 

 

 

 

 

 

고명자 시인

2005년 <시와 정신> 등단. 시집 『그 밖은 참, 심심한 봄날이라』 등이 있음. 2018년 백신애 창작기금 수혜.

 

 

 

 

AI 해설

 

 

이 시는 은목서의 향기를 매개로 상처, 그리움, 그리고 시간 속에서 스러져가는 기억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작은 생채기처럼 새겨진 아픔들이 쌓여 한 그루의 생을 이루고, 그 위에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피어나는 모습은 인생의 이중성을 상징합니다. 저물어가는 하루 속에서 스쳐 지나간 인연과 흔적들은 착각인지, 향기인지 모를 아련함으로 남아 있습니다. 희끗희끗한 응어리 같은 기억들은 은목서의 향기처럼 가을 저녁을 가득 채우고, 결국 남겨진 사람의 존재는 그 위태로움 속에서 더욱 아름답게 비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