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땅하다는 말
이정록 - 2023년 겨울호
2025-03-05
모땅하다는 말
이정록
삼춘이 왔지. 공부도 꼴찌. 달리기도 골찌. 싸움도 꼴찌인, 내 앞에 삼춘이 나타났지.
삼춘도 나처럼 공부도 못하고, 달리기도 못하고, 싸움도 못했지. 밀림의 전쟁터에서 오금에
총알이 박힌 삼춘. 맨 뒤에 뒤처졌으니까 맞았겠지.
허풍쟁이 삼춘이 잘하는 건, 안마당에 밥상 내팽개치기. 농번기에 풀밭에 누워 휘파람 불기.
마른하늘에 쌍욕 날리기. 하는 짓마다 놀부 흉내 내기. 그런 삼춘에게 모두 눈초리를 흘겼지.
삼춘은 똥덩이야.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그런 똥바가지 같은 삼춘이 늘
하는 말이 있었지. 모땅한대! 내가 바보처럼 웃어도, 모땅한대! 다리 잘린 방아깨비를 잡아 와도,
모땅한대! 밑으로 두 명밖에 없는 성적표를 들고 와도, 모땅한대! 목발 짚고 달리는 녀석을 겨우
앞지른 가을 운동회 때도, 모땅한대! 무슨 뜻인 줄 모르지만, 커다란 쇠똥이 작은 쇠똥구리를
응원하는 방귀 소리란 건 느낄 수 있었지.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모땅한대!란 말이었지.
스무 살이 넘어서야 알았지. 모땅하다!가 못 당하다!라는 커다란 말인 것을. 어찌어찌 늦되어
학교 선생에 작가까지 된 나는 아이들 앞에 서거나 다른 이의 글을 보면서 항상 되뇌었지.
모땅한대! 그럼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들과 세상이 나에게 묻지. 모땅하다는 말이 무슨 뜻이야?
글쎄. 나도 몰라. 어릴 때 바보 삼춘이 나에게 늘 한 말이었거든. 꺼벙이 삼춘을 만나면 물어볼게.
근데 삼춘이 모땅하다란 말을 많이 쓸 때는, 지금 너처럼 계속 물어볼 때였어. 그 어떤 물음에도
대답은 하나였지. 모땅한대! 질문이 세상에서 가장 모땅하단 거지.
넌 참 모땅해! 왜? 물음표가 세상에서 가장 넓고 깊고 길거든. 왜? 물음표는 끝이 없는 끝이거든.
왜? 삼춘이 오면 물어봐. 왜? 삼춘은 모땅하거든. 왜? 삼춘은 왜만 아는 사람이거든. 왜? 질문을 잃어버리면 총알 흉터가 물음표로 썩어버리거든. 왜?
이정록 시인
1964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의자」「정말」「어머니학교」「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동심언어사전」「그럴 때가 있다」등과 동시집 「콧구멍만 바쁘다」「저 많이 컸죠」「지구의 맛」「아홉 살은 힘들다」가 있다. 김수영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 박재삼문학상, 풀꽃문학상을 수상했다.
AI 해설
이 시는 '모땅하다'는 말을 중심으로 삶의 포용과 긍정을 표현한다. 삼춘은 세상의 기준에서는 부족하고 뒤처진 사람이지만, 화자에게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응원하는 존재다. "모땅한대!"라는 말은 실수해도, 실패해도 괜찮다는 따뜻한 위로이자 격려다. 또한, 시는 끝없는 질문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물음을 잃지 않는 것이 곧 삶을 살아가는 힘임을 보여준다. 결국, 이 시는 부족함 속에서도 삶을 긍정하는 태도와 끊임없는 질문이 가진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