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시 특집
시인수첩
2025-05-16시인수첩 25. 여름호 특집-디카시(평론)2
디카시, 혹은 시의 미래
오홍진(문학평론가)
1.
디카시 연구소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디카시의 정의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디카시는 스마트폰으로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날시)을 순간 포착하여 그 영상과 함께 문자로 표현하는 시로, 종이책을 넘어 SNS 등으로 실시간 쌍방향 순간 소통하는 것을 지향한다.” 스마트폰으로 순간 포착한 시적 형상(날시), 언어로 표현된 시, 그리고 실시간 SNS로 이루어지는 쌍방향 소통이 디카시를 구성하는 요소들로 맞물려 있다. 스마트폰이나 SNS 등과 같은 디지털 매체의 일상화가 디카시를 낳은 문화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디카시는 ‘디카’로 찍은 사진 이미지와 언어 표현이 하나로 이어진 새로운 문학 양식이다. 사진 이미지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는 점에서 디카시는 문자 중심의 기존 시와는 다른 창작법을 따른다. 사진 이미지와 언어 표현이 둘이면서 하나인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비로소 한 편의 디카시가 탄생한다.
디카시를 읽을 때 독자들은 사진 이미지를 먼저 보게 된다. 시인이 자연과 사물에서 순간적으로 포착한 시적 형상(날시)을 독자는 사진 이미지로 추체험한다. 사진 이미지에는 시인이 한순간 들여다본 사물의 극적 순간이 담겨 있다. 아직은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이미지를 사진으로 제시함으로써 시인은 자신이 구상한 세계로 독자들을 자연스레 이끌어 들인다. 독자들은 문자로 쓰인 시를 어려워한다. 시를 많이 읽지 않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영상문화에 익숙한 사회문화 역시 그에 못지않은 이유로 제시될 수 있다. 문자로만 된 시는 독자 스스로 머릿속에 영상을 그리며 읽어야 한다. 시어 하나하나를 해석하며 읽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가 어려우면 독자들은 상상하며 시를 읽는 일을 쉬이 포기해버린다. 어려운 상상을 하면서까지 그 시를 읽고 이해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문자로만 쓰인 기존 시에 비한다면, 디카시는 사진이라는 영상 이미지와 다섯 줄 이내의 짧은 시(언어 표현)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이 시를 좀 더 쉽게 대할 수 있도록 해준다. 눈 밝은 독자들은 이미 알아챘겠지만, 디카시는 아무래도 창작이론보다는 수용이론과 궁합이 맞는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독자 입장에서 봤을 때, 디카시의 사진 이미지는 뒤따라 나오는 언어 표현을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잡지에 실리는 디카시는 일반적으로 제목-사진 이미지-언어 표현(시)의 순으로 배치된다. 시 제목을 본 독자는 사진 이미지를 보며 제목에 담긴 맥락을 생각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문자로 표현된 시의 의미를 해석한다. 이미지로 표현할 부분을 사진 이미지로 제시하여 그만큼 언어로 표현할 내용을 줄이는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독자 입장에서는 시에 좀 더 쉽게 접근하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라고 봐도 좋겠다.
그늘을 베고 잘라가며 어느새 밑동까지 왔다
여전히 삶은 쓰다
시를 썼다
- 천융희, 「자화상」
‘자화상’이라는 제목 아래 밑동만 남은 나무가 사진 이미지로 제시되어 있다. 밑동만 남기까지 나무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밑동만 남고 몸통은 사라진 나무의 형상으로 시인은 생명의 자화상을 표현한다. 밑동에는 저 나무가 살아온 삶의 흔적이 새록새록 새겨져 있다. 흔적이 없으면 내력도 없다. 흔적에서 흔적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모든 생명은 저마다 간절한 마음으로 주어진 삶을 살아간다. 나무라고 다르지 않고, 사람이라고 다르지 않다. 시인이 밑동만 남은 나무의 이미지에 ‘자화상’이라는 시 제목을 붙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시인은 “그늘을 베고 잘라가며 어느새 밑동까지 왔다”라고 쓰고 있다. 자화상은 시간의 한 단락을 그림으로 제시한 것이지만, 그 속에는 한 생명이 살아온 무수한 흔적이 새겨져 있다. 시간이 남긴 흔적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시간 속에서 생명은 또 다른 생명과 관계를 맺으며 한 생을 꾸린다. 잎이 무성해지면 나무는 그 아래 그늘을 드리웠을 테고, 잎이 떨어지면 나무는 맨몸으로 차가운 바람과 마주했을 터이다. 밑동만 남은 나무는 과연 그런 시간을 얼마나 많이 보낸 것일까? 사진 이미지에 담긴 ‘밑동만 남은 나무’를 보며 독자들은 시인이 마음으로 그리는 자화상을 상상한다. 사진 속 저 나무가 울창했던 시절을 가슴에 품은 채 하루하루 시간을 견디듯, 시인 또한 이미 지난 시간을 그리워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지도 모른다. 마음으로는 여전히 하늘을 향해 힘껏 수많은 손을 뻗칠 수 있을 것도 같다. 환상으로만 남은 흔적을 곱씹으며 시인은 “여전히 삶은 쓰다”라고 고백한다. 시간이 흘러 몸에 붙은 모든 것을 내려놓았는데도 삶은 왜 이리도 쓰기만 한 것일까? 밑동만 남은 몸에 여전히 들러붙은 지독한 욕망 때문일까?
하긴 죽어서 땅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우리는 욕망이 드리운 그늘을 벗어날 수 없다. 시간을 산다는 건 욕망을 산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밑동까지 내려가서도 떨어낼 수 없는 이 욕망을 시인은 어떻게 다스리려고 하는 것일까? “시를 썼다”라는 시구에 그 해답이 나와 있다. 몸통은 사라지고 밑동만 남았는데도 여전히 쓰린 삶을 시인은 언어로 표현한다. “시를 썼다”는 시구에는 그러므로 쓰린 삶을 살아온 시인의 내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쓰린 삶을 살았기에 시인은 시를 썼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가슴에 쌓이는 설움을 한 편 한 편 시 언어로 기록했다. 그루터기만 남은 몸에는 이리 보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설움의 언어들이 새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무 밑동에 새겨진 그 언어들을 시인은 자화상이라고 부른다. 참으로 이채로우면서 아름다운 자화상이 아닌가.
디카시 한 편을 읽으려면 독자들은 사진 이미지와 언어 표현을 번갈아 들여다봐야 한다. 사진 이미지가 언어 표현을 향해 열려 있다면, 언어 표현은 사진 이미지를 통해 구체적인 형상을 얻는다. 사진 이미지와 언어 표현은 따로따로 구분되는 게 아니라 둘이면서 하나인 관계를 형성한다. 천융희는 위 시에서 나무 밑동을 찍은 사진 이미지로 자화상의 시적 맥락에 이르는 길을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독자의 눈은 사진 이미지에서 자연스레 언어 표현으로 이어지고, 그를 통해 독자는 사진 이미지에 표현된 나무 밑동이 왜 뭇 생명의 자화상과 이어지는지 찬찬히 사유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시인이 제시한 사진 이미지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의 풍경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문자시로는 채 담아내기 힘든 일상성을 디카시는 사진 이미지로 충분히 표현할 가능성을 열어 놓은 것이다.
2.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라면 어김없이 국어 시간에 시를 읽고 이해하는 방법을 공부했을 것이다. 선생님이 해석해주는 내용을 교과서에 빡빡하게 적으며 시를 공부했겠지만, 그럴수록 시가 참 어려운 것이라는 점을 그들은 온몸으로 체험했을 터이다. 영화 미학은 어려워도, 영화 보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2시간 동안 시 읽기와 영화 보기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시에 특별한 흥미를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영화 보기를 선택할 것이다. 영화는 무엇보다 화려한 영상으로 사람들의 감각을 자극한다. 이야기의 흐름이 느린 ‘예술 영화’도 있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상업영화는 이야기의 흐름이 아주 빠르다.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지 않더라도 관객들은 영화를 본 소감을 두려움 없이 이야기한다. 한 편의 시를 읽은 소감을 말해보라고 하면 침묵을 지키는 것과는 완연히 다른 상황이 펼쳐지는 셈이다.
영화처럼 강렬하지는 않지만 시에도 분명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도 시를 읽는 독자들은 이야기의 흐름을 상상하기보다 시어 하나하나를 해석하는 데 골몰한다. 시인이 쓰는 언어에는 일상적인 맥락을 넘어서는 함축적 의미가 담겨 있다. 시적 상황에 따라 언어의 의미는 다르게 해석되는바, 사람들이 시를 어려워하는 까닭은 무엇보다 여기서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문자로 쓴 시에 적절한 사진을 배치하는 포토포엠은 이러한 문자시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하나의 시도였으며, 문자시와 영상을 결합하는 방식 또한 영상 이미지를 통해 시 읽기를 수월하게 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시의 실험이 문자를 중심에 둔 상태에서 이루어졌다는 데 있다. 정확히 말하면 사진이나 영상은 문자로 쓰인 시에 흥미를 제공하는 역할에 한정되어 그 맥락이 결정된 것이다.
디카시는 사진 이미지와 언어 표현(시)이 하나로 이어져 의미를 만들어내는 양식이라고 했다. 시인은 일상 속에서 경험한 ‘특별한 순간’을 사진 이미지로 제시한다. ‘특별한 순간’이라고 했지만, 이 순간은 지극히 일상적인 순간이기도 하다. 일상의 순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는 물론 시인이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서 특별한 의미를 감지하고, 그것을 사진 이미지로 표현하는 순간 누구나 ‘(디카)시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답답한 교실에서 벗어나 교내를 거닐며 스마트폰으로 시적 순간을 찾아 헤매는 학생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라. 일상에서 느끼는 특별한 감각은 유명 시인의 시를 읽는다고 경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시인은 늘 다른 시선으로 사물이나 상황을 들여다볼 준비가 되어 있다. 특별한 순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특별한 순간을 보는 주체가 따로 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하겠다.
같이 있을 땐 몰랐다.
서로 닳아가며 닮아가는
같이의 가치를.
- 한재현, 「같이의 가치」
늦어져도 괜찮아.
- 소혜원, 「개학」
위에 인용한 두 편의 시는 아직 등단 과정을 거치지 않은 대학생들의 작품이다. 한재현의 「같이의 가치」를 먼저 읽어보도록 하자. ‘같이의 가치’라는 시 제목 아래 짝을 잃은 신발 한 짝이 사진 이미지로 제시되어 있다. 발이 둘이므로 신발도 두 짝이어야 한다. 두 짝이 되어야 할 신발이 한 짝만 있으니 무언가 허전해 보인다. 시인은 ‘같이’와 ‘가치’의 동음이의어로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한 짝의 신발에는 별다른 가치가 없다. 신발은 발을 보호하라고 있는 것인데, 한 짝의 신발로 어떻게 발을 보호할까? 시인은 “같이 있을 땐 몰랐다.”라는 시구로 한 짝만 남은 신발이 처한 상황을 표현한다. 같이 있을 때는 모르는 상대의 가치를 우리는 같이 있지 않을 때 비로소 깨닫게 된다. ‘나’가 있어야 상대가 있듯, 상대가 있어야 ‘나’도 있는 법이다. 같이 있을 때는 느끼지 못하는 ‘같이의 가치’를 시인은 한 짝만 남은 신발을 보며 새삼 떠올리고 있다고 하겠다.
시인이 ‘같이의 가치’를 절실하게 깨닫는 과정에는 “서로 닳아가며 닮아가는”이라는 시구에 암시되어 있듯, 시간의 흐름이 개입되어 있다. ‘같이’와 ‘가치’가 발음이 같다면, ‘닮아가며’와 ‘닮아가는’은 글자 모양이 비슷하다. 두 짝의 신발은 같은 시간을 보내며 서로 닳아갔을 것이고, 동시에 서로 닮아갔을 것이다. 시간은 모든 사물을 낡게 만든다. 한 짝만 남은 낡은 신발은 시간을 벗어날 수 없는 사물의 운명을 정확히 보여준다. 신발 한 짝에 담긴 생의 내력이야 굳이 말해 무엇 할까? 같이 있을 때는 몰랐던 ‘같이의 가치’를 깨닫는 순간 우리는 지나간 시간을 아쉽게 돌아본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걸 잘 알기에 우리는 더욱더 지나간 시절에 맺은 관계들을 아쉬워하는지도 모른다. 일상의 사물에서 흐르는 시간을 보고, 거기서 우리가 익히 기억해야 할 생의 가치를 발견한 것이 이 시의 장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소혜원의 「개학」에도 어김없이 일상에서 시인이 깨달은 생의 이치가 표현되어 있다. 온몸으로 길바닥을 기는 달팽이의 모습이 담긴 사진 이미지에 이어 “늦어져도 괜찮아.”라는 단 한 줄의 언어 표현(시)이 뒤따르고 있다. 몸 위에 집 한 채를 짊어지고 달팽이는 묵묵히 길을 걷는다. 속도를 중시하는 사람의 입장으로 보면 달팽이의 걸음은 참으로 느리기만 하다. 저런 걸음으로 어떻게 무한 경쟁이 중시되는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가뜩이나 마음을 새로이 다잡아야 하는 개학 날이다. 개학 첫날부터 느릿느릿 길을 나서면 언제 목적지에 도달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경쟁에서 이기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보다 한 발짝이라도 앞서 걸어야 한다. 달팽이의 생과는 다른 방식을 받아들여야 자본이 만든 성채에서 내쫓기지 않을 수 있다.
시인이 이런 상황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시인의 눈에 왜 느릿느릿 몸을 움직이는 달팽이가 들어왔겠는가? 달팽이의 느린 삶이 쉴 틈을 주지 않는 문명의 삶과 이어지기 힘들다는 것을 시인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런데도 시인은 달팽이의 느린 걸음을 외면할 수가 없다. 빨리 걷는다고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로 가는 과정에는 수많은 변수들이 놓여 있다. 늦게 가고 싶어 늦게 가는 게 아니므로 시인은 “늦어져도”라는 피동사를 사용한다. “늦어져도”의 상황을 뚫고 “괜찮아”의 마음 상태로 나아가려면 넓고도 깊은 심연을 건너야 한다. 달팽이의 느린 걸음은 자연이다. 달팽이는 자연의 순리를 따른다는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인간은 과연 어떨까? 자본주의는 느린 달팽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열심히 하는 사람보다 잘하는 사람을, 요컨대 자본을 증식하는 사람을 자본주의는 원한다.
자본주의의 생리를 비판한 책을 읽으며 그와는 다른 길을 상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 일상의 특별한 순간을 경험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워 보인다. 시 쓰기와 연동되지 않는 시 읽기를 학생들은 지겨워한다. 딱딱한 의자에 앉아 아무리 시를 공부(?)해도 시는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만 기억에 새겨진다. 우리가 디카시를 새로운 시의 미래로 거듭 들여다봐야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디카시의 탄생은 스마트폰이라는 문명의 이기(利器)와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 학생들은 어느 순간에도 스마트폰을 몸에서 떼지 않는다. 길을 걸을 때도, 공부를 할 때도, 잠시 쉴 때도 스마트폰은 늘 그들 곁에 붙어 있다. 스마트폰이 만든 새로운 세계와 밀착된 삶을 그들은 산다고나 할까? 언어적 상상과는 다른 자리에서 디카시의 도구적 상상력이 뻗어 나올 가능성이 그만큼 넓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게임이나 영화의 화려한 이미지에 익숙한 세대는 사물 또한 가상현실 속에서 사유하는 특성을 내보인다. 가상현실은 쉽게 말하면 이미지로 그려진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처럼 느껴도 그것은 결코 현실이 아니다. 현실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거기에는 분명 현실과는 다른 또 다른 ‘현실’이 내포되어 있다. 디지털 이미지로 구현되는 가상현실은 현실을 대체하는 ‘다른 세계’와 이어진다. 보이는 세계만 있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수많은 세계가 있다. 일상 속에서 일상과는 다른 세계를 시적으로 사유하는 존재로서 시인을 떠올려 보라. 언어를 매체로 하는 문학은 게임이나 영화 이미지가 보여주는 세계를 넘어서는 풍부한 상상력을 함유하고 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분명 언어적 상상력에 담긴 드넓은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면, 문제는 결국 그것을 드러내는 방법을 탐구하는 데로 집중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임이나 영화의 영상 이미지에 익숙한 사람들은 문자로 된 텍스트에 쉬이 적응하지 못한다. 신문 기사 하나를 보더라도 그들은 버릇처럼 인터넷을 검색한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되니 알고 싶은 정보를 찾는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는다. 인간이 도구를 만들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도구가 인간을 개조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사람들은 안절부절못한다. 그들에게 스마트폰은 몸 밖에 있는 단순 도구가 아니라 몸과 하나가 되어버렸다. 언어로 사유하는 게 습관화된 시인이라고 해도 이러한 시대 변화를 외면할 수는 없다. 1980년대만 해도 시 안에 신문 만화를 삽입하는 해체시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표현 매체의 한계를 느낄 때 시(인)는 항상 다른 길을 모색하는 법이다. 디카시는 언어와 더불어 사진 이미지를 필수적인 매체로 도입함으로써 문자시와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디카시는 언어와 사진이 하나로 어울리는 형식을 지향한다고 했다. (디카)시인에게 스마트폰은 한 편의 시를 낳는 시적 도구라고 할 수 있다. 문자시를 쓰고 그에 걸맞은 사진을 배치하는 포토포엠과는 달리 디카시는 디카로 사진을 찍는 일에서부터 시 창작이 시작된다. 교실이나 사무실 안에만 있으면 디카시를 쓸 수 없다는 얘기다. 교실에 갇혀 지식 쌓기에만 급급한 학생들 입장에서 보면, 디카시는 교실 바깥으로 나갈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좋은 시를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면 디카시를 쓰는 일은 말 그대로 즐거운 놀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문자로 쓰는 시를 놀이로 대하는 학생이 과연 있을까? 전문적으로 시를 쓰려고 다짐한 학생이 아닌 다음에야 취미로 시를 쓰는 학생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시가 꼭 시인만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디카시는 그 형식으로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소년 소녀의 추억 수숫단
주인 잃은 수숫단
비바람에 날아갈까
눈보라에 얼어버릴까
여름 내내 꽁꽁 묶어주는 넝쿨
- 윤예진, 「기다림」
나무 그늘 아래 낮은 개울가
저만치 소녀가 앉았던 징검다리
소년의 눈을 열면 모두 다 보이는데
- 김종회, 「징검다리」
위에 인용한 두 시는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에 나타나는 소년과 소녀의 사랑 이야기를 밑바탕에 깔고 있다. 윤예진의 「기다림」은 2017년 ‘제1회 황순원 디카시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고, 김종회의 「징검다리」는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으로 활동하는 기성 문인의 작품이다. 「기다림」을 지은 윤예진은 공모전 수상 당시 예고 1학년 학생이었다. 소설 속에 나오는 ‘수숫단’과 ‘징검다리’를 소재로 두 시인은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순수한 사랑을 시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수숫단은 소년과 소녀가 소나기를 피해 들어간 장소이고, 징검다리는 소년과 소녀가 처음으로 만난 장소이다. 징검다리가 사랑이 시작되는 장소라면, 수숫단은 사랑이 무르익는 장소라고 할 수 있겠다. 윤예진은 ‘기다림’이라는 제목으로 소년과 소녀의 풋풋한 사랑을 표현하고, 김종회는 소년의 눈으로 ‘징검다리’를 ‘보며’ 풋풋한 사랑을 상상한다.
윤예진은 황순원 문학촌에 조성된 ‘수숫단’에서 소년과 소녀의 추억을 엿본다. 이미 지나간 사건을 되돌아보는 게 추억이다. 이제는 “주인을 잃은 수숫단”이지만, 시인은 여전히 소설로 읽은 소년과 소녀의 풋풋한 사랑을 마음 깊이 기억하고 있다. 소나기를 피하려고 들어선 수숫단에서 소년과 소녀는 서로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느낀다. 시인은 이렇듯 순수한 사랑이 “비바람에 날아갈까/ 눈보라에 얼어버릴까” 염려한다. 소년과 소녀의 추억이 짙게 묻은 수숫단 속으로 또 다른 누군가가 뛰어들 수도 있지 않은가? 수숫단을 “꽁꽁 묶어주는 넝쿨”로 시인은 사랑이 메말라가는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새삼 이야기한다. 주인을 잃고 외로이 서 있는 수숫단은 지금도 풋풋한 사랑의 열정에 빠진 연인들을 기다리고 있다. 시간 속에서 점점 희미해지는 풋풋함의 미학이 이 시에는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김종회는 「징검다리」에서 “소년의 눈”을 시적으로 탐색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소년의 눈”은 사물을 달리 보려는 시인의 눈과 이어져 있다. “소년의 눈”으로 시인은 나무 그늘 아래로 흐르는 낮은 개울가를 보고, 소설 속 소녀가 앉아 있던 징검다리를 상상한다. “소년의 눈을 열면 모두 다 보이는데”라는 시구에 암시된바 그대로, 시인은 “소년의 눈”을 잃고 일상의 늪에 빠진 어른들의 통념을 말하고 있다. 일상에 깊이 물든 어른의 눈에는 징검다리는 그저 징검다리로 보이고, 수숫단은 그저 수숫단으로 보일 뿐이다. 사물에 드리워진 사회 통념에 맞추어 어른은 사물을 보기 때문이다. 어른의 눈이 가둔 “소년의 눈을 열면” 보이지 않던 세계가 갑작스레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 눈이 열리면 징검다리는 “저만치 소녀가 앉았던 징검다리”로 거듭난다. 일상과는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디카시는 일상 속에서 갑자기 출현하는 시적 사물을 사진 이미지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문자시와는 다른 양식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언어로 표현해야 할 부분을 사진 이미지로 제시함으로써 디카시는 다섯 줄 안팎의 짧은 시로 시상(詩想)을 표현한다. 문자시를 읽는 데는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디카시를 큰 부담 없이 즐기는 이유는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디카시가 시의 전문성을 떨어뜨린다고 지적하는 문인들도 있지만, 이들은 시의 전문성이 시 읽기를 방해하는 근원이 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에두르지 않고 말하면 디카시 운동은 애초부터 시를 전문성의 틀에 가두려는 견해와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등단 과정을 거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틀에 박힌 시를 쓰고 또 쓰는가? 사회 통념, 곧 제도가 만든 틀을 벗어나야 할 시가 도리어 틀에 맞춘 시를 양산하는 상황이라니.
사진 이미지 하나를 시작(詩作)에 도입하는 일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놀이처럼 (디카)시를 즐길 수 있다. 문자시에는 도통 관심을 보이는 아이들이 디카시 창작에는 관심을 보이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 사진 이미지를 얻으려면 교실 밖으로 나가야 한다. 스마트폰을 들고 교내와 교외를 돌아다니며 특별한 순간을 디카로 찍는 아이들을 떠올려 보라. 전문성의 영역에 시를 가둬버리면 시를 읽고 즐겨야 할 아이들은 정작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교실에 앉아 선생님의 강의를 듣는다고 시를 읽는 능력이 생기지는 않는다. 시를 읽으며 시인이 경험한 특별한 순간을 추체험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특별한 순간을 직접 체험하는 것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제 몸처럼 생각하는 스마트폰을 들고 일상과는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디카시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예감할 수 있다.
디카시가 문자시를 완전히 대체하는 시 양식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인간의 상상력이 살아 있는 한 문자시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언어를 매개로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는 일이 매혹적이라는 것은 분명하니까. 중요한 것은 이 매혹적인 상상을 언어에 가둘 필요는 없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디카시는 시의 외연을 넓히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다양한 매체를 시에 끌어들인 해체시 실험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해체시는 그 난해함으로 독자들을 시로부터 더욱더 멀어지게 했다. 디카시는 독자들에게 시를 창작할 계기를 부여하려고 한다. 시를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시를 쓰게 만들려고 한다. 시의 영역을 넓히려다 도리어 시의 전문성만 강화한 해체시와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대중성과 문학성을 하나로 이으려는 디카시의 미래를 우리가 눈여겨봐야 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즉물성의 파르마콘
이재복 (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디카시가 하나의 새로운 장르로 정립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디지털카메라’에 대한 해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 디카시의 장르적 토대를 결정하는 디지털카메라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아날로그적인 도구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아날로그적인 도구들은 그것을 수행하는 예술가의 의지와 행위에 의해 그 쓰임이 결정되는 수동적이고 보조적인 도구에 불과하다. 이로 인해 이 도구들은 그것을 수행하는 예술가의 몸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가령 아날로그적인 도구들 중 바이올린을 예로 들어보자.(전자 바이올린이 아닌) 이 아날로그 악기가 지니는 존재성은 현(줄), 활, 판 등으로 이루어진 형태내지 구조에 있다. 이 구조가 다른 악기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 장르와의 차이를 결정한다. 하지만 이 구조 이외에 이것이 하나의 음악으로서의 정체성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작용을 스스로 수행하지는 못한다. 이것은 이 악기와 그것을 통해 구현되는 음악이라는 양식이 전적으로 예술가의 의지와 행위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아날로그적이다.
아날로그와 달리 디지털 도구들은 인간의 몸보다는 bit를 토대로 한 디지털 원리에 의해 작동하기 때문에 복잡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호성과 잡음이 거의 없다. 이것은 인간의 몸이 구현해낼 수 없는 다양한 세계의 차원을 포착, 조절, 조정, 구성, 변형해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몸이 지각하는 세계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인간은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다시 말하면 몸의 확장을 위해 새로운 매체나 테크놀로지의 발명에 온 힘을 기울여 왔던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디지털카메라 역시 인간의 몸(눈)의 확장 과정에서 얻어진 부산물로 볼 수 있다. 인간의 몸은 그 차체가 욕망의 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몸이 없다면 욕망도 없고, 욕망이 없으면 근심이나 걱정도 없는 것이다. 인간의 몸에서 눈은 그 욕망 중에서도 가장 강한 욕망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의 진정한 욕망은 무엇인가를 보려는 의지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이다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이다 하여 시각을 인간 욕망의 맨 앞에 둔 데에는 그것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위험성을 동시에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전자의 차원에서 볼 때 인간에게 시각이란 자신이 보려는 대상의 은폐된 세계를 드러내려는 의미에 해당되고, 후자의 차원에서 볼 떼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표피적이고 진실이 왜곡된 세계에 해당된다. 인간의 몸의 욕망이 어디를 지향해 왔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처해 있는 상황과 세계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를 지향해야 하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을 수 없다. 특히 철학이나 역사, 문학과 같은 인간의 바른 길과 공동체의 윤리를 탐구하는 인문학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 시인들은 어떤 방식으로 대상을 혹은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언어를 통해 그 대상이나 세계를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언제나 이 문제는 언어와 대상 하이에 놓여 있다. 언어 내에서 우리는 그 대상을 관념화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보고 인지하는 대상은 관념화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 관념을 통해 드러나는 대상은 얼마나 온전한 자신의 존재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어떤 관념에 입각해서 우리가 사물을 보고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 사물의 진정한 세계에 도달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이러한 보기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대표적인 시인이 바로 김춘수, 오규원이다. 시에서 관념이나 의미를 배제하고 그 대상의 실체를 리듬이나 이미지만으로 구현해내려고 했던 김춘수, 그리고 시에서 사변적인 것을 배제하고 날것으로의 이미지를 강조했던 오규원의 시도들은 시에서 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를 잘 말해준다. 이들의 시도가 궁극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차원으로서의 세계도 아니고 또 하나의 관념이나 사변의 차원으로 존재하는 세계도 아닌 그 사물이나 세계가 어떤 것에도 구속받거나 왜곡되지 않은 채 날것으로 움직이고 그 과정에서 의미가 창출되는 그런 세계를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디카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디지털카메라에 의해 포착되어 드러난 세계이다. 디지털카메라는 테크놀로지의 산물이다. 디지털의 원리는 단순하다. 모든 존재 혹은 존재자 자체를 0과 1로 조각낸 다음 그것을 무한수열적인 조합을 통해 무엇인가를 생산해내는 원리이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카메라의 발달로 이어진 것은 물론 이에 비례해 인간의 시각을 통한 욕망도 커지게 했다. 카메라의 눈은 화소 경쟁을 통해 점점 더 대상이나 세계를 선명하게 하려는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 1억 화소에서 2억 화소로, 그리고 인간의 눈(5억 화소)을 능가하는 6억 화소의 센서 개발에 도전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사람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세균까지 볼 수 있는 센서를 꿈꾸고 있다”(박용인)는 한 전자회사 간부의 발언은 극에 달한 보려는 욕망의 한 양상을 드러낸다. 디카시의 정체성이 카메라에 있다면 그 누구도 그런 눈을 장착한 카메라로 대상을 찍어야 하는 운명을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디지털카메라와 시의 결합을 통해 탄생한 디카시의 새로움과 불안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안다면 이 일이 꼭 기쁜 일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화소의 증가로 인해 사람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대상까지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은 곧 시각 대상에 대한 즉물성의 증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 자체를 놓치지 않고 보다 선명하게 또 보다 자세하게 포착해서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보지 못한 순간을 볼 수 있게 한다거나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여 즐거움을 준다는 점에서 그것은 우리의 삶에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즉물성의 증대는 지나치게 시각을 비대하게 함으로써 다른 감각을 제한하게 할 위험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계 이면에 존재하는 보다 크고 깊은 세계에 대한 상상과 이해를 가로막을 위험성이 있다. 선명하게 드러난 세계만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 그 너머에 모호하고 불투명한 세계가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면 이미지와 상상에 기반한 진정한 미의 영토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이정록의 「당신이 오신다기에」 송찬호의 「비상」
디지털카메라가 드러내는 이러한 즉물성의 불안은 그대로 우리 디카시에 대한 불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디카시라는 태생 자체가 디지털 문명의 산물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결코 피해갈 수 없는 문제이다. 우리는 지금 bit를 기반으로 한 디지털 전자 문명 하에서 온갖 즉물적 이미지들로 넘쳐나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이 즉물적 이미지들은 우리의 깊이 있는 상상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단순한 감각적인 쾌와 불쾌의 차원에서 그것들은 생산되고 또 소비되기에 이른다. 디지털카메라가 어떤 대상을 어떻게 포학해서 드러내느냐가 디카시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수행하는 주체인 시인은 디지털 카메라의 물성과 이것에 의해 만들어진 사진 이미지의 물성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물성이 강조되면 그것은 감각적인 유희에 가까운 시가 되는 것이고, 물성보다 상상의 여지가 강조되어 드러나면 그것은 미적 깊이를 내재한 시가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 대중들이 디카시에 보이는 관심은 매체와 시의 결합이라는 기존의 시 양식과는 다른 양식의 출현에서 오는 신선함, 디지털카메라라는 도구를 통해 어렵지 않게 시를 창작해내는 그 용이성, 깊은 사색이 아닌 우리 몸의 감각을 통해 체험하는 즉물적 유희성 그리고 사진이 가지는 푼크툼적인 요소와 시가 지니는 상상적 요소와의 결합에서 오는 미적 쾌감 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여기’의 대중은 깊이를 추구한다기보다는 감각적인 유희를 추구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라는 양식이 하나의 유희로 존재할 수 있는 잠재성과 개연성이 디카시에 내재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즉물적 유희성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혹은 그것을 어떻게 하나의 시의 양식으로 포섭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디카시의 정립과 관련해서 매우 크리티컬한 논의를 제기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즉물성이 디카시의 정립에 약이 될지 아니면 독이 될지 그것에 대한 논의는 불안하면서도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언제나 예술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탄생하기도 했고 또 소멸하기도 했던 것이다.
"SNS 날개를 타고 빛보다 빠른 속도로 전달되는 디지털 별의 향연”
-벼리영 디카시집 『십자가 너머(Beyond the cross)』작품세계
정유지(경남정보대 디지털문예창작과 교수)
”디카시는 과학의 산물이다. 세 가지 변신을 통해 과학 3종 세트를 생성시킨다. 첫 번째, 디지털사진작가의 변신을 통해 영상 미학을 수놓는 자연과학이 관통하고, 두 번째, 스토리텔러(Storyteller)의 변신을 통해 5행 이하의 시적 문장을 완성하는 인문과학이 관통하고, 세 번째, 한 줄짜리 카피를 만들어내는 카피라이터(Copywriter)의 변신을 통해 제목이 눈에 확 띄게 클로즈업시키는 사회과학이 관통한다. 즉 세 번의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
디카시는 변신의 대명사다. 디카시는 디지털 제목, 디지털 영상(사진), 디지털 글쓰기의 삼위일체로 연동되어야 한다. 한 몸으로 이루어진 멀티언어다.
1. 존재론적 자각을 통해 인간의 정체성을 회복하다.
“자식에게 부모는 우주다. 부모에게 자식은 신이다. 아무것도 못하는 무능한 신. 부모는 그런 자식을 극진히 섬긴다.”
인용된 것은 영화 <대가족>에서 큰스님으로 출연한 이순재 배우의 대사다. 자식인 ‘나’는 무능하고 무능했고, ‘아버지’는 무능한 ‘나’라를 ‘신’을 최선을 다해 섬겼다. 온 우주가 사라진 후에야 스스로가 얼마나 무능했는지 오랜 시간에 걸쳐 깨달아 가고 있다. 우주를 잃게 되면 내가 자식들의 우주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존재적 자각을 벼리영 시인의 디카시집 『십자가 너머(Beyond the cross)』를 통해 감상할 수 있다.
“그림을 그리듯 구도를 잡고 셔터를 누릅니다.
입체파를 흉내 내기도 하고 클림트의 화풍을 풍경 속에서 포착하기도 합니다.
사조(思潮)를 넘나드는 디카시와의 만남,
오랜 전통에서 하이퍼미디어까지
시대를 초월하며 다가온 디카시가 가슴을 두드립니다.
감동 있는 그림처럼 섬세하게 다른 이의 가슴을 두드리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인용된 것은 <작가의 말>에 나오는 내용이다. 디카시인이 디카시를 창작하려면 간절함이 있어야 함을 엿보게 한다. 인간의 간절함은 시대의 위기를 주도하고, 언제나 가소성(可塑性)을 존재하게 했다. 간절함은 태양보다 뜨겁고, 달보다도 차가운 상상력을 탄생시킨다.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 극한 상황이나 파국의 위험도 따른다. 주기적 고비를 관통하는 절실함의 확장은 결국엔 노력의 결실과 열매를 얻는다. 폴 발레리는 1920년 발표한 시 「해변의 묘지」를 통해 삶이란 결국 바람으로 설정하고 있는 가운데,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는 심연 위에서 태양을 발견한다. 영원한 원인을 갈구하는 구도자의 간절함을 설파하면서, ‘시간은 반짝이고 꿈은 지식’임을 역설한다. 폴 발레리의 절실함이 아름다운 시편을 생산하는 발원지가 되었다. 벼리영 시인에게 있어 절박함은 ‘십자가 너머의 세계’로부터 비롯된 감성의 시적 장치다. 그 시적 장치가 『십자가 너머(Beyond the cross)』를 견인하는 근원이 되었다. 벼리영 시인은 순간 포착의 셔터로 생성시킨 절절한 감성의 메타포를 통해 자신만이 그려낸 독특한 빛깔의 디카시를 생산하고 있다.
벼리영 시인은 화가지만 지금은 시인 소리를 더 많이 듣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손의 통증 때문에 붓을 놓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치병에 걸렸어도 희망을 놓지 않고 꾸준히 자기개발을 해온 불굴의 의지를 가진 작가이다. 《월간문학》 신인작품상을 통해 문단에 나왔고, 남강문학상 대상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시와 시조 쓰기를 병행했다. 이번 디카시집까지 일곱 권의 시집을 출간한 저력 있는 작가로 인식되어 있다. 현재 계간 《한국디카시》 편집주간, <글로벌디카시연구소> 사무국장으로 왕성한 활동을 전개해 오고 있는 역량있는 작가이다.
벼리영 시인의 시적 세계는 크게 두 가지 경향을 보인다.
첫째, 여성 특유의 섬세한 이미지 조합 역량으로 빚어내는 선명하고 명징한 멀티언어의 안목을 견지하고 있다. 나무뿐 아니라 숲 전체를 관통하는 시안(詩眼)을 견지한 채, 인간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휴머니티의 집 한 채를 만들고 있다. 아울러 벼리영 시인의 정신세계는 맑고 그윽하다. 노인 문제와 현실 인식에서 촉발된 시심을 바탕으로 정제된 시어와 존재적 자각으로 완성시킨 디카 언어들이 인생의 깊이로 어우러져 디지털 세상을 밝히고 있다.
둘째, 무한의 상상력으로 구축한 새로운 이미지의 디지털 우주 궤도에 그리움과 고독을 담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디지털 세상을 밝히는 디지털 북극성과 같은 방향성 또한 담보하고 있다. 낯선 디지털 세상을 밝히는 디지털 행성을 그리워하듯 진한 고독마저 물씬 묻어난다. 그 고독의 끝에 이르면 경계와 경계를 넘나드는 SNS의 바다에 다다른다. 그 순간 디지털 영혼의 전언이 부딪힌다. 디지털 영혼의 전언은 디지털 노매드(Digital nomad)의 시적 울림이다. 벼리영 시인이 구축한 이미지의 궤도 위로 영혼의 전언이 밀려든다.
벼리영 시인은 노인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깊은 사유의 세계를 구가한다. 「노인 유치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도로를 종횡했던 젊은 날을 회상하며
할 말이 많아 입을 못 다문다
- 노인 유치원」전문
인용된 디카시는 젊은 시절의 삶과 경험을 회상하며, 그로 인해 생긴 생각들을 표현하고 있다. 시적 문장을 통해, 주로 노인이 된 시인의 시각에서 젊은 시절의 삶을 돌아보며, 그때의 꿈과 열정, 그리고 지금의 현실을 비교하고 반성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첫 행에서‘도로를 종횡했던 젊은 날을 회상하며’의 시적 문장에서, 노인들의 젊었을 때 자유롭고 열정적인 삶을 떠올리는 있다. 즉, 젊은 시절에 삶을 자유롭게 누리며, 여러 곳을 떠돌고 경험을 쌓았던 순간들을 의미한다. 이는 지금의 '폐타이어=노인'이 된 자신과는 다른, 활력 넘치는 시절을 회상하는 메타포로 볼 수 있다. ‘할 말이 많아 입을 못 다문다’에서, 젊은 시절의 경험이 너무 많아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는 의미다. 젊은 시절의 경험들이 시인의 삶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그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중요해지고, 그만큼 그때의 삶이 그리워진다는 감정을 그려낸다. 이 디카시는 폐타이어를 노인으로 비유할 수 있는 전생을 그려낸다. 아울러 젊은 그 시절에 느꼈던 감정과 꿈, 그리고 지금의 현실을 회상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시인은 젊은 날의 자유로움과 그때의 희망찬 마음을 떠올리면서,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든 현재 자신이 놓친 것들, 혹은 변한 것들을 아쉬워하는 마음도 담겨있다.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것을 넘어서, 그때의 열정과 꿈을 여전히 간직하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며, 삶에 대한 성찰과 아쉬움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결국 「노인 유치원」은 시간을 지나며 변해가는 자신을 돌아보고, 그 안에서 여전히 살아있는 젊은 시절의 꿈과 열정을 놓지 않으려는 시인의 마음을 담고 있는 수작이다. 시인은 노인문제에 대해 항상 성찰을 거듭한다. 「요양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담벼락에 기대어 볕을 쬐고 있는 저 백발 노인들
그 누구도 그립다 말 못 하고
먼 하늘만 보고 또 보고
- 요양원」 전문
인용된 디카시는 노년의 고독과 외로움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늙어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무력감과 고독을 담담하고도 강렬하게 어필하고 있다. 디카시는 디지털 영상의 담벼락을 ‘요양원’으로 설정하고, 담벼락 앞에 있는 갈대들을 ‘노인’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 디카시는 노인들의 심리 상태와 그들이 겪고 있는 감정의 내면을 드러내고 있다. ‘담벼락에 기대어 볕을 쬐고 있는 저 백발노인들’에서 시인은 요양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노인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들은 햇볕을 쬐며 시간을 보내지만, 그들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은 단순한 평온함이 아니라, 삶의 끝자락에서 맞이하는 일상적인 무기력함과 고독이다. '백발'이라는 표현은 그들의 나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며, 시간의 흐름과 결국 찾아오는 노화의 현실을 암시한다. ‘그 누구도 그립다 말 못 하고’라는 시적 문장에서, 노인들이 내면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아쉬움을 담고 있다. 노인들은 아마도 과거의 삶이나 떠나간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립다’는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서로의 고독을 공유할 수도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점이 부각된다. 사람들이 노화와 고독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먼 하늘만 보고 또 보고’는 노인들이 하늘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그린 시적 언술이다. 하늘은 끝없이 넓고 먼, 변화하는 대상이지만 그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통해, 노인들이 가진 삶의 한계를 나타낸다. 그들의 시선은 이제 사람들에게 닿지 않고, 그저 멀고 먼 하늘을 응시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노인들이 느끼는 고립감을 더욱 부각시키며, 이들이 현실과의 연결을 잃어버린 채 고독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요양원」은 노년의 외로움, 고독, 그리고 삶의 끝자락에서 느끼는 무력감이 생성된다. 시인은 요양원의 공간을 통해 시간이 흐른 후의 사람들의 감정을 담백하게 드러내며 인간 존재의 연약함과 그로 인한 고독을 깊이 느끼게 만든다. 노인들의 고독이 상징적으로 담긴 이 디카시는,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노화와 죽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유도한다. 시인은 가족의 의미를 재탄생시킨다. 「가족관계증명서」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아버지는 노랗게
어머니는 점점 노랗게
아직 파릇파릇한 나,
그렇게 익어가는
닮은 꼴, 우리 가족
- 가족관계증명서」 전문
세 개가 나란히 이어진 연잎의 영상기호를 보고, 하나의 가족관계증명서로 바라본 시각이 참으로 놀랍다. 가족 간의 유사성과 세월의 흐름을 중심으로, 가족 구성원들의 관계를 성찰하는 디카시이다. 이 작품은 간결한 언어로 가족의 내밀한 변화를 담아내며, ‘닮은 꼴’이라는 표현을 통해 세대 간의 유사성, 그리고 시간에 따른 변화를 드러낸다. ‘아버지는 노랗게 / 어머니는 점점 노랗게’의 시적 문장에서, 시인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노화 과정을 묘사한다. '노랗게'라는 표현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겪는 자연스러운 변화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이 변화는 자연스러운 노화의 과정이지만, 그 안에는 어쩔 수 없는 삶의 무상함이 느껴진다. ‘아직 파릇파릇한 나’에서, 시인은 '파릇파릇한 나'라는 표현을 통해, 자신이 아직 젊고 생기 넘치는 상태임을 강조한다. 영상기호에서도 파릇파릇한 이미지가 이를 뒷받침해 준다. '파릇파릇'은 신선하고 생명력 넘치는 이미지를 상징하며, 이것은 자신이 아버지와 어머니와는 다른 세대에 속해 있음을 나타낸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노랗게' 변해가는 동안, 자신은 아직 젊음과 생동감을 지닌 존재로, 그들보다 시간이 뒤에 있다는 사실을 은근히 드러낸다. ‘그렇게 익어가는 / 닮은 꼴, 우리 가족’에서, 마지막 부분은 ‘익어간다'는 시적 언술을 통해, 시간에 따라 점차 변화하는 가족 구성원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익어간다'는 것은 물리적, 감정적 변화 모두를 포함하는 표현으로, 사람들은 나이를 먹으며 점차 ‘익어간다’고 볼 수 있다. 이때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닮아간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며 부모의 모습이 자식에게서 보이고, 자식은 부모의 모습을 조금씩 닮아간다는 점에서, ‘닮은 꼴’은 생물학적 유사성뿐만 아니라 감정적 유대와 세월의 흐름을 뜻한다. 이 디카시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일어나는 세대 간의 변화를 그린 작품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노화 과정, 그리고 그들로부터 물려받은 자식의 생명력 넘치는 모습이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맞물려 있다. 시인은 ‘닮은 꼴’이라는 주제로,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닮아간다는 사실을 나타내며, 이는 단순한 외적 유사성뿐만 아니라, 가족 간의 인연과 세대 간의 흐름을 성찰하는 지점을 제공한다. 시인은 고독에 대한 의미를 숙고한다. 「독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두려운 건 어둠이 아니라네
어둠보다 더 지독한 외로움이라네
- 독거」 전문
「독거」는 외로움과 고독에 대한 심오한 성찰을 담고 있는 디카시이다. 배수구 입구에서 자라는 식물을 디지털 영상으로 순간 포착하고, 이를 ‘독’거라는 한 줄짜리 카피로 유통시키고 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어두운 환경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어둠을 넘어서는 인간 내면의 고독을 강조한다. 특히, ‘두려운 건 어둠이 아니라네, 어둠보다 더 지독한 외로움이라네’라는 시적 문장은 어두운 환경 속에서도 더 큰 공포는 외로움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이 작품은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해 묻고 있다. 어둠은 단순히 외적 환경을 의미할 뿐, 진정한 고통은 그 어둠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고립감에서 비롯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사람들은 때로 외로움이 신체적 고통보다 더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한 고독은 마음속에서 서서히 쌓여가며, 결국 그 어떤 어둠보다 더 깊고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게 된다. 시인은 이와 같은 감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독자에게 공감과 성찰을 이끌어낸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시대적, 사회적 맥락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현대 사회에서 개인주의와 빠르게 변하는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종종 소외감을 느끼고, 이는 고독으로 이어지곤 한다. 「독거」는 이러한 사회적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주며, 고독과 외로움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자극한다. 결국 이 작품은 고독을 넘어서 자신과의 진지한 대화를 촉구하고, 더 나아가 타인과의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일깨워준다. 시인은 고독을 넘어서, 둘만이 존재하는 「무인도」를 향한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단둘이 살고 싶었지
꿈을 이뤘는데
왜 이리도 한숨만 나오는 걸까
- 무인도」 전문
「무인도」는 물 위 바위에 앉아 있는 두 마리 새를 디지털 영상으로 순간 포착하여, 이를 ‘무인도’로 연동시켜 진술하고 있다. 인간은 소우주에 비유할 수 있다. 공허함이 내재된 소우주이다. 군중 속에서도 고독을 느낄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자아 탐색에 관한 디카시이다. 인용된 작품은 현대인의 고독과 그로 인한 갈등을 진지하게 탐구하고 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단둘이 살고 싶었지’라는 첫 문장은, 외부 세계의 압박이나 복잡함을 피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낸다. 우리는 종종 세상의 소음과 기대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며, 그리하여 ‘무인도’ 같은 고립된 공간에서의 평화를 상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꿈을 이뤘는데 왜 이리도 한숨만 나오는 걸까’라는 시적 문장은 그러한 고립이 결코 이상적이지 않음을 깨닫게 한다. 시적 화자는 꿈을 이룬 것처럼 보이지만, 그 꿈이 주었던 기대와는 달리 그 안에서 느끼는 공허함과 불안감이 커지기만 함을 피력한다. 이는 우리가 때때로 소망하는 자유와 고독이 실제로는 심리적 부담이나 불안으로 바뀔 수 있다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한다. 이 작품은 물리적인 고립이 아닌, 정신적 고립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독자에게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단순한 외적 고독이 아니라, 자신과의 깊은 소통과 평화라는 것을 일깨운다. 고독 속에서 얻은 자유가 결국 자기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내면의 혼란과 갈등도 피할 수 없다는 점을 그려낸다. 작품은 끝내 고독을 완전히 긍정적인 것으로 그려내지 않고, 그 속에서 마주하는 현실의 씁쓸함과 괴로움을 정직하게 진술한다.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그것을 향한 욕망이 결국은 우리가 스스로 직면해야 할 감정임을 보여주며, 우리의 내면과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든다.
2. 진정한 인생은 즐길 수 있는 삶을 주도할 때, 그 의미가 배가된다.
삶은 때로 거친 파도처럼 우리를 몰아치고, 예상치 못한 어둠 속에서 길을 잃게 한다. 그러나 그 고통과 갈등 속에서도 우리는 멈추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시인은 삶의 여정에서 마련한 「쉼터」에서 말하는 잠시의 쉼과 「십자가」 너머의 새로운 시작은, 우리가 마주한 시련 속에서 희망을 찾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한다.
고통의 순간, 시인은 ‘어둠은 빛을 못 이긴대’라는 한 마디에 위로를 얻는다. 그 어떤 악성 댓글과 외로움도 우리가 가진 희망의 힘을 이길 수 없다. 「희망 문자」처럼, 짧고 간결한 응원의 말 하나가 가슴 깊은 곳에 울림을 주고, 「너를 보면 눈물이 나」처럼 끈질긴 생명력을 통해 결국 살아나는 그 존재들을 위하여 따뜻한 눈물도 쏟는다.
그리고 그 모든 여정의 끝자락에서, 「다대포 서곡」처럼 우리는 인생의 격랑 속에서 한 걸음씩, 고요히, 그러나 강력하게 연주를 이어간다. 각자의 인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서곡이 되어, 우리가 겪은 시련과 아픔이 결국은 가장 아름다운 연주로 이어짐을 알려준다.
시인은 그 모든 과정, 그 모든 순간을 디카시로 여정의 새로운 페이지를 엮고 있다. 쉼과 고난, 그 속에서 찾은 희망과 위로, 그리고 우리가 나아갈 길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의 기록이다. 이 모든 스토리텔러의 시적 진술이 작은 쉼터와 같은 위로가 되고 그 속에서 빛을 발견하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꽃피운다. 시인은 온쉼표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쉼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바다 한가운데라도 좋아
비바람으로 부러진 날개를 잠시 접을 수 있다면
어디로 날아가든 나는,
신의 손바닥 안에 있다는 것
- 「쉼터」 전문
시인은 포항시 호미곶 해맞이 광장에 위치한 ‘상생의 손’ 기념물을 순간 포착하고 있는 가운데, ‘상생의 손’이 새들의 안식처이자 「쉼터」임을 부각하고 있다. 「쉼터」는 인간 존재의 한계와 삶에서 느끼는 갈망, 그리고 안식을 찾고자 하는 욕망을 깊이 있게 탐구하는 디카시다. ‘바다 한가운데라도 좋아 / 비바람으로 부러진 날개를 잠시 접을 수 있다면’이라는 시적 문장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 잠시라도 쉬고 싶어 하는 절절한 울림이다. 이는 마치 인생의 험난한 여정에서 잠시나마 그 고통을 내려놓고, 안전한 공간에서 회복하고 싶은 절실한 소망을 드러낸다. ‘어디로 날아가든 나는, / 신의 손바닥 안에 있다는 것’은 이 작품에서 중요한 테마인 '안전'과 '위안'을 강조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물리적, 정신적 고통 속에서도 결국 신의 손길 아래 있다는 믿음을 통해 위로를 찾고 있다. 이는 삶에서 힘든 순간에 우리가 지닌 존재의 의미와, 그 존재가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통해 안식과 안정감을 찾으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인간이 처한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 찾는 쉼터, 즉 내면적인 평화와 회복을 묘사하고 있다. 고통이 너무 크고 깊어 보일 때, 우리는 일시적인 안식처를 갈망하게 된다. 그리고 그 안식처는 외부의 환경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연결, 혹은 신의 뜻과 연대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으로 표현된다. 「쉼터」는 결국 인간 존재의 한계와 갈망을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과 안식을 찾으려는 여정을 다룬다. 고통 속에서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외부의 조건이 아니라, 내면의 평화와 자신을 지탱하는 믿음임을 깨닫게 한다. 이 작품은 쉼터가 단순히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마음과 영혼의 안식을 의미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시인은 깨달음의 언어를 축적한다. 「십자가 너머(Beyond the cross) 2」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내 기도가 불길처럼 번져갈 때 번개처럼 스치는 말씀
백지처럼 비우고 다시 시작하라는 무언의 울림
당신이 쓴 희고 정갈한 언어
- 「십자가 너머(beyond the cross) 2」 전문
시인은 구름 낀 날, ‘십자가’를 순간 포착하여 이를 정갈한 언어로 승화시키고 있다. 「십자가 너머(beyond the cross) 2」는 영적 성장과 내면의 치유, 그리고 새로운 시작에 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내 기도가 불길처럼 번져갈 때 / 번개처럼 스치는 말씀’이라는 시적 문장에서 기도와 신의 말씀 사이의 강렬한 교감을 표현한다. 기도가 불길처럼 번져가는 이미지와 번개처럼 스치는 말씀이 상징하는 것은, 신의 뜻이나 영적인 메시지가 강력하고 순식간에 마음에 다가오는 순간을 묘사한 것으로, 신의 존재와 의도가 얼마나 깊고 즉각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나타낸다. ‘백지처럼 비우고 다시 시작하라는 무언의 울림’은 이 작품이 전하는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로, 인간이 삶의 복잡함과 얽힌 감정들에서 벗어나 새로운 출발을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백지에 비유된 마음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비워낸 상태에서 진정한 깨달음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영적인 성찰과 자기 혁신의 과정을 상징하며, 우리가 과거의 상처나 억눌린 감정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드러낸다. ‘당신이 쓴 희고 정갈한 언어’는 신의 언어가 얼마나 순수하고 고요하며, 그 자체로 깨끗한 치유의 힘을 지닌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희고 정갈한 언어'는 신의 뜻이 인간의 마음에 다가오는 방식으로, 혼잡하고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진리를 찾으려는 이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혼란을 넘어, 명료하고 깊은 이해와 깨달음을 안겨주는 언어다. 「십자가 너머(beyond the cross) 2」는 결국 인간의 내면에서 신과의 만남, 영적 성찰, 그리고 재탄생을 다룬 작품이다. 신의 말씀은 단순히 종교적 규범을 넘어서,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중요한 교훈을 주며, 그것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변화와 성장으로 이어진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 작품은 독자에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신과의 깊은 소통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준다. 시인은 긍정의 마인드를 유지한다. 「희망 문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악성 댓글 물리치고 전해온 네 문자
‘어둠은 빛을 못 이긴대'
‘힘내!’
- 「희망 문자」전문
시인은 도심의 구름 속에 비친 ’서광‘을 영상기호로 순간 포착하면서, 이를 「희망 문자」로 인식하고 있다. 「희망 문자」는 현대 사회에서의 고통과 고립 속에서 희망을 찾는 과정을 그린 디카시로, 간결하면서도 깊은 감동을 전해준다. 이 작품은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가 우리의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은 현대 사회에서 악성 댓글이나 비판으로 인한 상처를 물리치고, 그 속에서도 희망과 위로를 찾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악성 댓글 물리치고 전해온 네 문자’라는 시작은 우리가 흔히 겪을 수 있는 온라인상의 부정적인 경험을 뜻한다. 악성 댓글은 사람을 상처 입히고, 때로는 그 상처가 너무 커서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 상황 속에서도 ‘전해온 네 문자’는 희망의 메시지로, 악성 댓글에 맞서 싸우며 그 안에서 소통과 위로를 찾으려는 의지를 나타낸다. ‘어둠은 빛을 못 이긴대’라는 시적 문장은 이 작품의 핵심적인 메시지로, 어둠과 고난은 일시적인 것이며 결국에는 빛, 즉 희망과 긍정적인 에너지가 승리한다는 믿음을 전하고 있다. 이 시적 문장은 단순한 위로가 아닌, 내면 깊숙이 새겨지는 진리처럼 다가온다. 고통과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빛을 찾고, 그 빛은 결국 어둠을 이겨낼 수 있다는 강력한 신념을 전달한다. ‘힘내!"라는 문장은 짧지만 진심 어린 응원의 말이다. 비타민 같은 응원의 말은 긴 설명 없이도 큰 위로와 힘을 줄 수 있다. ‘힘내!’는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도록, 서로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메시지를 간결하게 담고 있다. 「희망 문자」는 촌철살인의 메시지다. 그 속에 담긴 메시지는 깊고 강력하다. 고통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작은 응원의 말이 얼마나 큰 힘이 될 수 있는지 깨닫게 해주는 디카시다. 이 작품은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어두운 순간 속에서도 희망을 찾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준다. 시인은 한마디로 감성의 여왕이다. 「너를 보면 눈물이 나」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길이 아닌 길은 가지 말라 했는데
장벽을 디딤돌 삼아 꿈을 이루다니
- 너를 보면 눈물이 나」 전문
시인은 돌담 사이로 생명의 보랏빛 꽃을 피워 올린 이미지를 순간 포착하며, 「너를 보면 눈물이 나」와 같은 심경을 왈칵 쏟아내고 있다. 「너를 보면 눈물이 나」는 인간의 고난과 시련을 딛고 꿈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을 그린 디카시로, 희망과 용기, 그리고 불굴의 의지를 표출하고 있다. ‘길이 아닌 길은 가지 말라 했는데 / 장벽을 디딤돌 삼아 꿈을 이루다니’라는 시적 문장은 인생에서 겪는 어려움과 고난을 새로운 기회로 변환시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길이 아닌 길은 가지 말라 했는데’라는 부분은, 전통적인 길이나 사회적 규범을 따르라는 충고를 상기시킨다. 이는 일상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겪는 딜레마를 보여주며,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길을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인 선택이지만, 그 길이 항상 최선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벽을 디딤돌 삼아 꿈을 이루다니’라는 구절은 그 모든 어려움과 장애물을 오히려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발판으로 삼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현한다. 장벽은 단순히 막고자 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거나 활용하는 방법을 찾을 때, 오히려 그 자체가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다. 이는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바꿔 나가자는 의도도 숨겨져 있다. 이 작품은 인생에서 마주하는 여러 가지 고난과 어려움에 대한 도전적인 태도를 제시하며, 꿈을 향한 여정이 순탄치만은 않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그렇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도 결국 자신의 길을 찾아 나가는 용기와 의지를 강조한다. 이는 단순히 감동적인 이야기나 교훈을 넘어, 사람들에게 실제로 삶의 위기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 주는 메시지를 전한다. 「너를 보면 눈물이 나」는, 꿈을 향한 여정에서 맞닥뜨리는 장애물들을 부정적인 요소로만 보지 않고, 그것을 이겨내면서 성장하고 발전하는 과정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시인은 쉼의 가치도 삶의 중심에 둔다. 「다대포 서곡」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바다로 진입하기 전
생의 줄기에 찍은
온쉼표 하나
격랑의 바다
최고의 연주를 위한
-「다대포 서곡」 전문
시인은 부산의 다대포 해수욕장에서 방문객이 스마트폰에 내장된 디지털카메라로 찍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는 가운데, 이를 ‘다대포를 위한 서곡’으로 인식하고 있다. 「다대포 서곡」은 인생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그 사이의 격동적인 여정을 음악적이고 심오하게 묘사하는 디카시다. ‘바다로 진입하기 전 / 생의 줄기에 찍은 / 온쉼표 하나’라는 시적 문장에서, ‘바다’는 삶의 대변혁과 변화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바다로 나아가기 전, 즉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하기 전에 '온쉼표 하나'가 존재하는데, 이는 인생의 어느 순간, 휴식과 성찰의 필요성을 나타낸다. 쉼표는 잠시 멈추어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준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쉼표는 삶의 속도와 복잡함 속에서 잠시 멈추어 숨을 고르고, 깊은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격랑의 바다’는 인생이 마주하는 고난과 시련을 상징한다. 바다는 고요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격렬하고 거친 파도 속에서 방향을 잃기도 하고,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격랑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고, 그것을 통과하는 과정이 인생에서 중요한 성장의 순간임을 암시한다. ‘최고의 연주를 위한’이라는 시적 문장은, 격랑을 헤치고 나아가면서 결국 우리가 마주하는 목표는 고요하고 아름다운 '연주'처럼 완성되는 삶을 뜻한다. 모든 어려움과 시련은 그 자체로 연주를 위한 중요한 악보가 되어, 결국 우리의 삶이 하나의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는 과정을 상징한다. 이에 삶의 고난을 극복하며, 마침내 그 고난이 우리에게 최고의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다대포 서곡」은 인생을 음악적인 관점에서 풀어내며, 각자가 겪는 격랑 속에서 자신만의 서곡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을 풀어낸다. 이 작품은 삶의 여정에서 중요한 '쉼표'를 인식하고, 그 쉼표 후의 '격랑'과 그로부터 비롯된 '연주'가 결국 최고의 완성으로 이끄는 서곡임을 인식하고 있다.
디카시는 이제 단순한 디지털 문학을 넘어, 국경을 초월하여 빠르게 확산시키는 멀티언어다. SNS라는 날개를 타고, 빛보다 빠른 속도로 전 세계를 넘나드는 디카시는 마치 디지털 별처럼 우리의 문화와 감정을 전달한다. 디카시는 신대륙이다. 디카시 콜럼버스가 필요하다. 벼리영 시인은 계간 『한국 디카시』 주간으로서, 디카시 세계화를 실천하는 디카시 콜럼버스다. 대한민국이 디카시의 종주국이다. 이에, 디카시인은 한국 한글문화 콘텐츠를 세계에 알리는 책무 또한 가지고 있다. 디카시는 디지털 영상과 디지털 글쓰기, 디지털 제목을 연동시켜, 한국을 넘어 세계를 향한 K-디카시 열풍이란 큰 물결을 만들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한 일이다.
벼리영 시인의 디카시집 『십자가 너머(Beyond the cross)』는 디지털 세상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을 치유하는 멀티종합 언어로 비유할 수 있다. 우리 시대 디지털 선물임을 알 수 있다.
디카시 문예 운동 20년의 명암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명예교수)
1-1. 들어가며: 디카시 20년의 성과
디카시라는 새로운 문예 형식이 발원한 지 올해(2024)로 벌써 20년째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디카시는 이상옥 시인이 2004년에 최초의 디카시집 『고성가도』를 출판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시집은 인터넷 ‘한국문학도서관’ 이상옥 시인의 개인 연재 코너에 ‘디카시’라는 신조어로 두 달간 연재했던 50편의 작품들을 묶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 이미 이상옥의 머릿속에‘디카시’의 개념이 거의 완성된 상태로 들어와 있었다고 보아도 된다. 그는 이어서 『디카시를 말한다』(2007), 『앙코르 디카시』(2010)와 같은 시론적 성격의 디카시 관련 단행본들을 연이어 낸 후에 마침내 2017년에 『디카시 창작 입문』이라는 이름의 본격적인 디카시 이론서를 냄으로써 디카시의 개념을 체계적으로 정립한다. 이상옥 시인은 디카시를 개념-이론적으로 체계화한 이후에도 일반 시집 외에 『장산숲』(2018), 『고흐의 해바라기』(2021), 『에덴의 동쪽』(2024) 등의 디카시집들을 연이어 출간함으로써 디카시를 이론화하는 작업뿐 아니라 디카시의 창작-실천에도 앞장서고 있다. 이후 디카시가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이상옥 교수와 더불어 무엇보다 디카시 운동의 트로이카라고 하는 김종회 교수, 최광임 교수의 국내외 전방위에 걸친 문예 운동의 성과과 함께 천융희 계간 <시와경계>, <디카시> 부주간, 이기영 한국디카시인협회, 한국디카시연구소 사무총장의 노고도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이렇게 시작된 디카시는 지난 20년 동안 새로운 문예 장르로서 누가 보아도 확실할 정도로 자리를 잡아왔다. 2018년엔 최광임 시인의 디카시 해설서 『세상에 하나뿐인 디카시』(2006)를 통해 디카시(서동균 시인의 디카시 「봄)」)가 최초로 검정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었으며, 2019년엔 고2 ‘전국연합학력평가’에 디카시(공광규 시인의 「수련잎 초등학생」)가 시험문제로 출제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앞서 2016년엔 디카시라는 용어가 국립국어원에 문학 용어로 등재되었는데,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공교육과 공공 문화 영역에서 디카시가 발원 10여 년 만에 이미 새로운 장르로서 공적인 인정을 받기 시작했음을 알려주는 지표이다. 2024년엔 한국디카시인협회에서 기획하고 준비한 ‘디카시창작지도사’ 자격증이 민간자격으로 문화관광부에 법적 ‘등록’이 (허가)되었으며, 이로써 4급에서 1급까지 주1회 수업을 기준으로 각 12주씩 총 48주(대학 학제로 치면 3학기 넘는 기간)에 걸친 전문적인 교육과정을 거쳐 디카시창작지도사 자격증을 부여하는 제도를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디카시의 교과서 등재와 더불어 대중적이자 전문적인 문화 운동으로서 디카시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는 또 하나의 지표이자 앞으로의 새로운 활동을 위한 새로운 도약대임이 분명하다. 디카시창작지도사 자격증 과정은 디카시의 엄청난 확산과 더불어 디카시의 정체성과 관련된 무수한 혼란을 막고 디카시에 관한 전문화된 교육을 통하여 전국에서 활동할 신뢰할 만한 디카시 ‘강사’들을 배출한다는 의미에서 지난 디카시 문예 운동의 매우 소중한 성과이자 인프라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성과와 나란히 한국디카시인협회(회장 김종회)는 2020년에 제1회 창립총회 겸 디카시학술 심포지움을 개최한 이래 매년 공개 학술대회를 통해 다양한 각도에서 디카시의 이론과 현황을 계속 점검해 왔는데, 디카시가 학문적 연구 대상으로도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 디카시를 주체로 한 전문적인 학술논문은 물론 석박사 학위논문까지 점점 더 많이 출판되고 있다. 한국디카시인협회는 지금까지 전국에 총 11개의 지부와 지회를 설립하며 활동을 체계적으로 조직화하였고, 외국으로도 이런 노력을 계속 확산하여 현재 해외에 총 17개의 지부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디카시에 대한 대중적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전국의 다양한 지자체, 도서관, 각종 단체, 문학관 등이 주최, 주관하는 디카시 공모전들이 일 년 내내 열리고 있으며, 그 종류와 횟수도 갈수록 확산일로에 있고, 상금액도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계간 <<디카시>> 외에도 계간 <<시와경계>>를 위시하여 각종 (시)문학 전문지에 디카시 관련 섹션이 점점 더 활성화되면서 문자시만 쓰던 많은 시인이 디카시 창작의 울타리를 넘어오고 있으며, 이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2024년엔 일간지(<대구신문>) 신춘문예도 디카시 장르에 새로 문을 열기 시작했다. 디카시 공모전뿐만 아니라 디카시 창작의 열풍이 불면서 전국 곳곳에 디카시 관련 소모임과 강좌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열리고 있으며, 전문 시인들과 일반인들의 디카시집의 출판도 갈수록 늘고 있는 추세이다.
1-2. 디카시, 그 원론에 대한 정확한 이해의 중요성
이렇게 종합해 보면 지난 20년에 걸쳐 진행되어 온 디카시 문예 운동은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상당한 성취에 이른 것이 분명하다. 물론 이런 성취의 구체적이고도 가장 실제적인 동력은 현장에서 디카시 문예 운동을 주도해 온 몇몇 문인들의 헌신적인 노고에서 찾아야겠지만, 이 과정에서 디지털 혁명 시대의 새로운 문예 양식으로서의 디카시 자체의 수월성도 중대한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하다. 디카시 문예 운동을 주도해 온 주체들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디카시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가장 최적화된 새로운 문예 형식의 하나임이 확인되고 있다. 디카(디지털카메라)가 스마트폰 안으로 들어와 그것의 사용이 대중화되고 일상화될 정도로 발전된 테크놀로지의 변화가 없었더라면 디카시라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 역시 불가능했다. 한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하부구조)이 그 사회의 문화적 상부구조를 조건 짓는다는 마르크스의 논리가 이렇게 잘 맞아떨어지는 사례도 드물 것이다. 문제는 디카로 순간 포착한 사진 이미지에 순간 언술로서의 문자 기호를 결합해 새로운 예술 형식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대한 정확한 이해이다. 디카시의 개념을 창시한 이상옥 교수는 여기에서 문자 기호에 양적 제한(최대 5행 이내, 그러나 가능한 한 더 짧을수록 좋다는 입장)을 부여하고 사진 이미지와 문자 기호 사이의 관계를 정확히 설정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디카시를 기존의 사진시와 차별화한 것이야말로 디카시 이론의 핵심적 성과이다.
디카시의 사진을 사진예술의 관점에서 파악하여 이렇게 찍어야 하고, 저렇게 찍어야 한다는 식으로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님을 다시 강조해 둔다.
몇 번 말하듯 디카시의 사진은 그 자체로 사진예술이 아니다. 디카시의 문자는 그 자체로 시가 아니다. 이 둘이 합해져서 완벽한 하나의 텍스트가 된다.
디카시에서는 영상과 문자, 둘이 함께 존재하지 않으면 존재 의미를 상실한다. 디카시의 영상을 사진예술과 비교하지 말아야 하며, 디카시의 문자를 일반 문자시와도 역시 비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략)…
한편으로 디카시 창작에 있어서 영상을 배제하고, 디카시의 문자를 문자시의 완결성처럼 써서도 곤란하다. 시인이 디카시를 쓸 때도 영상을 고려한 것이어야지 그렇지 않고, 문자시처럼 써서는 안 된다.
(이상옥, 『디카시 창작입문』 2017, 85-87)
얼핏 보면 단순한 이야기 같지만, 위의 정의야말로 디카시에 대한 이상옥 교수의 가장 창의적이고 핵심적인 이론이다. 디카시의 효과와 문제는 항상 그것이 사진 이미지와 문자 기호의 결합이라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사진이나 문자 중 어느 하나의 완결성을 비대칭적으로 강조할 때 디카시는 출발도 전에 사라지고 만다. 디카시는 창작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사진예술로서의 사진 이미지의 배타적 완결성을 지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문자시로서의 문자 기호의 배타적 완결성을 지양한다. 이 ‘이중적이면서도 동시적인 지양double and simultaneous sublation’이 사진 이미지와 문자 기호 사이의 대칭적 화학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조건을 생산한다. 말하자면 디카시는 그것의 두 가지 구성 요소인 사진 이미지와 문자 기호 어느 한 쪽의 배타적 완결성을 동시에 거부하면서, 그 대가로 양자 사이의 집중적이고도 강도 높은 상호작용을 끌어내는, 매우 창의적이며 독특한 예술형식이다. 이상옥은 심지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완결성의 측면에서 다소 미완의 영상, 다소 미완의 문자가 한 몸을 이룰 때 완벽한 디카시가 될 수 있다. 이 말은 디카시에서 문자의 경우 문자시처럼 완벽한 텍스트성을 갖추어서는 곤란하다는 말이다.” 이어서 그는 바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듭 말하지만 디카시의 문자는 그 자체로서는 시가 아니다. 문자기호에 불과하다. 그것이 영상과 한 몸을 이룰 때 영상과 함께 디카시가 되는 것이다.”(147) 이런 대목이야말로 디카시의 원리와 정체성을 정확히 지적하는 핵심적인 언술이며, 디카시에 대한 오해와 몰이해는 대부분 디카시의 이런 속성에 대한 무지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디카시 창작자는 사진 이미지나 문자 기호 각각의 개별적인 완성도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그것들이 서로 맞대면하며 박치기할 때 생겨나는 문화적, 미적 효과의 생산에 주력해야 한다. 가장 훌륭한 디카시는 바로 사진 이미지와 문자 기호 사이의 이와 같은 대칭적 충돌에서 성취된다. 그리고 이 충돌은 오랜 계산이 아니라 (이상옥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극순간”에 일어나야 한다. 그에 따르면 “디카시야말로 현대시가 점점 잃어가고 있는 순간의 양식에 충일한 것”이다. 그가 이런 점에서 디카시를 “극순간의 양식”(『디카시 창작입문』 80)이라고 정의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1-3. 디카시, 성과 이면의 문제점들
앞에서 말한 대로 디카시 문예 운동 20년의 주요성과는 크게 1) 제도권에서 디카시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문예 장르로서 공적인 인정을 받고 자리를 잡게 된 것과 2) 논자들 대개가 엄청나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는 ‘양적 팽창’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런 맥락 때문에 디카시의 원론적인 개념을 간략히 다시 살펴보았다. 디카시의 양적 팽창에 따른 가장 큰 문제점이 디카시의 정체성에 대한 오해나 혼란에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디카시 공모전 광고에서 디카시는 “창작자 본인이 직접 카메라(디지털카메라, 휴대전화 내장 카메라)로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을 포착하여 찍은 사진과 함께 본인이 창작한 5행 이내의 문자(시적 문장)로 표현”하는 것으로 소개되는데, 대부분의 응모자들은 위의 설명을 기존의 사진시와 별다른 차별성이 없는 것으로 받아 들인다. 즉 ‘사진에 5행 이내의 시를 첨부한 것이 디카시’라는 거친 이해가 대부분의 디카시 창작자들의 머릿속에 있는 디카시의 개념이다. 사실 디카시 전문 창작자가 아닌 다음에야 일반인들에게 디카시에 대한 공부와 이론적 이해를 강요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이런 사정이 디카시라는 새로운 장르의 특수성과 창의성에 대한 몰이해로 이어진다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디카시는 사진시와 특별히 다를 게 없는 장르로 간주 되고 그에 따라 그것의 지속적인 발전에도 일정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디카시를 쓰는 일반 시인들조차도 위에 소개한 디카시의 원론적인 개념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매우 흔하다는 (엄중한!) 사실이다. 이런 상황이 초래하는 문제는, 시인들이 가끔 청탁이 들어오면 억지로 쓰기는 하지만 디카시를 사진시와 별반 다를 것 없는―말하자면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그리고 문자시에 비해서 한층 격이 떨어지는 B급 아마추어 장르로 간주하는 것이다. 아직도 디카시에 특별한 관심이 없는 일반 시인들 사이에서는 디카시에 대한 이와 같은 부정적 태도가 상당히 지배적인데, 그것은 대체로 디카시에 대한 몰이해와 왜곡된 인식에서 비롯된다.
2-1. 하이쿠에서 찾을 수 있는 지혜
일본 하이쿠(俳句)의 기원을 16세기말에 렌가(連歌, 5·7·5<-->7·7조로 여러 사람이 번갈아 읊는 시)가 쇠퇴하면서 하이카이 렌가(俳諧[골계의 뜻]連歌, 이하 하이카이)로 발전하는 시기로부터 잡으면 하이쿠의 역사는 무려 4~500년에 이른다. 렌가가 쇠락하고 하이카이가 발전했던 배경을 보면 그 시기에 일본에서 유럽과의 교류를 통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본격적으로 대두하면서 상인, 중인 계급, 말하자면 (문화적으로 따지자면) 사대부들이 아닌 소위 B급 주체들이 대거 등장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렌가는 교육받은 사대부들의 장르였고 그 고급스럽고 진지한 형식 때문에 B급 대중 주체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장르였다. 하이카이는 이런 맥락에서 문화의 새로운 주체들로 등장한 상인, 중인 계급의 사람들이 렌가를 패러디하여 대중적인 기지와 유머, 민중적 해학을 일상어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과정에서 태어난 ‘대중적’ 예술 장르였다. 하이카이가 갖고 있는 이 대중성은 초기 하이쿠의 저변확대와 발전에 나름 큰 역할을 행사하게 된다. 그러나 하이카이가 계속해서 이와 같은 대중성에만 의존했다면 오늘날의 하이쿠와 같은 지속적이며 영향력이 있는 장르로 발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이카이의 생산 주체가 일반 대중이 되면서 그것의 저급한 문학성이 상대적으로 문젯거리가 될 무렵인 17세기 중후반에 마쓰오 바쇼 같은 전문 시인들이 대거 합세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하이카이는 대구(對句)가 없는 5·7·5 3구 17음절의 새로운 장르(하이쿠)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이쿠가 하이카이의 대중성을 기반으로 시작, 발전되었다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대중성을 유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에 본격문학으로서의 수준 높은 성취가 합쳐지면서 오늘날과 같은 세계 문학의 장르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하이쿠의 형식적 대중성은 그것의 단순성에 있다. 하이쿠는 매우 단순한 규칙을 가진 짧은 시이기 때문에 약간의 관심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하이쿠의 창작 주체 즉 ‘하이진(俳人)’이 될 수 있다. 첫째, 하이쿠는 5·7·5, 3구, 17음절로 써야 한다. 둘째, 하이쿠엔 계절을 나타내는 계어(季語 기고)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셋째, 하이쿠엔 어느 한 부분을 끊어 단절을 만드는 조사나 조동사, 즉 절자(切字 기레지)가 있어야 한다. 하이쿠는 하이카이에서 사용하던 분방하고도 일상적인 표현에서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누구나 쓸 수 있는 단순한 형식을 채용함으로써 사대부를 넘어 일반 대중의 문예 장르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이쿠가 후기 하이카이처럼 대중적인 말장난의 수준에 머물렀다면 오늘날과 같은 세계적인 문학 장르로 남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현재 일본의 하이쿠 인구는 500만 명을 넘어선다고 한다. 하이쿠는 일상의 자유로운 표현과 단순한 형식으로 다수 대중을 창작 주체로 끌어들이면서 일본의 가장 대표적인 ‘생활 문학’으로 자리 잡았다. 동시에 하이쿠는 수많은 전문 시인의 등장과 참여로 대중문학의 범주를 넘어 본격문학으로서도 손색없는 장르로서 미국의 이미지즘 시 운동 등 세계 문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제 하이쿠는 생활 문학이자 본격문학의 범주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다수 대중과 전문 시인들의 사랑을 동시에 받고 있다.
디카시는 사진 이미지와 5행 이내의 문자 기호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시라는 점에서 하이쿠 이상의 매우 단순한 형식적 요건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디카로 사진찍기가 일상화된 상황에서 디카시의 이런 기발하고도 단순한 형식은 많은 대중을 디카시 창작의 대열로 끌어들이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일반인들에게 문자시를 쓰라고 하면 대부분 난감해하지만, 디카시의 간단한 원리를 가르쳐주고 디카시를 쓰라고 하면 대부분은 큰 부담 없이 흥미를 갖고 디카시 창작에 달려든다. 현재 전국에 수많은 디카시 동호인이 생겨나고 있고 전국 단위의 다양한 공모전에 수많은 응모자가 쇄도하는 것은 바로 디카시의 형식이 가지고 있는 이와 같은 대중성에서 그 일차적인 원인을 찾을 수도 있다. 말하자면 디카시는 디지털 시대에 최적화된 새로운 문예 형식으로서 출발부터 확실한 대중적 기반을 가지게 되었고, 디카시의 대중성은 오래 묵은 ‘문학의 위기 담론’을 상쇄할 정도로 파격적인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디카시가 다수 대중의 손으로 들어가면서 예술적 성취의 수준에서 아마추어리즘이 상례화되는 경우이다. 다수의 일반인이 디카시의 창작 원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이 디카시 창작에 뛰어들고 있고, 다수 대중이 창작해 내는 디카시의 수준을 보고 전문 시인들이 디카시를 대중의 생활 문학으로만 폄하를 하면서 디카시 창작 대열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않을 때, 디카시는 생활 문학 혹은 취미 문학의 단계에서 멈추어 버릴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추세를 고려할 때, 생활 문학으로서의 디카시는 앞으로 점점 더 확산이 될 가능성이 매우 확실한데, 이것은 그 자체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므로 일차적인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디카시는 디지털 시대에 최적화된 형식의 제시를 통해 다수 대중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이 과정에서 디카시의 울타리를 넘어 일반 문학 혹은 인문학 전반에 관한 관심의 환기로 이어질 수도 있다. 좋은 디카시를 쓰려면 자연스레 좋은 문학과 인문학적 사유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카시가 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계속 발전하려면 현재의 대중성에 수준 높은 전문성이 접목되지 않으면 안 되며, 그것은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성취될 수 있다고 본다. 첫째는 일반인들의 디카시 창작 성과들이 축적되면서 자연스레 일반인들의 창작 수준이 점차 제고되는 현상을 기대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디카시 문예 운동의 주체들은 디카시의 창작 원리에 관한 올바른 지식을 대중에게 제공할 필요가 있고, 여기에서 (앞에서 언급한 바 장기간에 걸쳐 전문적인 디카시 창작 교육을 완수하고 자격을 취득한) 디카시창작지도사들의 역할은 앞으로 갈수록 더 중요해질 것이다. 둘째는 전문 시인들이 디카시에 관한 정확한 지식에 토대하여 수준 높은 디카시를 창작하는 대열에 더욱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다양한 장치를 궁리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디카시에 관하여 정확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디카시를 b급 장르로 간주하고 아예 무시하는 일부 전문 시인들의 경향을 불식하고 본격적인 디카시 발표의 다양한 지면으로 유도하는 여러 방안의 강구가 절실하다.
2-2. 나가며: 디카시 이론의 재해석과 진화를 위하여
서두에서 언급했다시피 디카시는 이상옥 교수에 의해 최초로 이론화되었고 아울러 창작의 실제도 처음으로 제시되었다. 한국디카시인협회는 창립 이후에 매년 디카시를 주체로 한 공개 학술 세미나를 개최해 왔으며 이런 자리들을 통해 디카시의 이론과 현황을 다양한 각도에서 검토해 왔다. 디카시 이론에 대한 다양한 (재)해석은 디카시의 차별적 정체성과 새로운 가능성을 끄집어내는 일이며, 디카시 발원 20주년을 맞이하며 앞으로 기존의 디카시 이론을 보족할 새로운 논제들이 있다면 그런 것들에 대한 진중한 검토 역시 제대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사진 이미지를 매개로 하는 디카시의 장르적 특징은 디카시에 전통적 서정시와는 다른 문학적 결을 제공한다. 가령 (창작) 주체의 주관성에 대한 회의는 철학뿐만 아니라 문학 내부에서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가령 랭보(A. Rimbaud 1854~1891)는 데카르트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던 근대적 주체의 개념을 근대의 전성기에 이미 문제 삼았다. 그는 세계 인식의 확실한 중심으로서의 자아의 존재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나는 다른 누군가이다I is someone else”라고 정의함으로써, 주체의 자리를 탈중심화하였다. 그는 “나”의 상태 동사를 ‘am’이 아닌 ‘is’로 표기함으로써 “나”의 전권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의 주관성을 배제하며 최대한 “객관적인 시(la poésie objective)”를 쓸 것을 제안하였다. 이론적으로 체계화되지는 않았지만, 랭보의 ‘객관적인 시’의 개념은 근대적 주체-권력에 대한 근대 시인의 시적 회의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엘리엇(T. S. Eliot 1888~1965)은 시가 시인의 “강력한 감정의 자연스런 범람”(워즈워스W. Wordsworth)이라는 낭만주의적 시 개념을 거부하고 대신에 “시의 비개성성impersonality of poetry”을 강조하였다. 그는 “시는 감정의 느슨한 방출이 아니라 감정으로부터 도피”이며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 도피”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런 관점에서 시가 감정의 직접적 표현이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객관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을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포르투갈 시인인 페르난도 페소아(F. Pessoa 1888~1935)는 실제로 수십 개의 이명(異名 heteronym)을 사용해 시를 발표함으로써 단일한 주관성single subjectivity이라는 강력한 중심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문학 내부에서 이어져 오래 이어져 내려온 주관성에 대한 이와 같은 거부는 주체와 대상의 강력한 동일시에 근거하고 있는 전통 서정시의 문법과 근대적 주체에 대한 뿌리 깊은 회의의 태도를 동반한다. 시의 재료를 시인의 서정이 아니라 문자와 단어 자체의 물질성에서 찾는 (주로 브라질, 독일의) 구체시concrete poetry운동이나, 읽는 시가 아니라 보는 시를 지향하며 시의 재료를 비디오 자료, 미술, 조각, 홀로그램, 컴퓨터 그래픽 등으로 확대하고 있는 (주로 브라질의) 시각시visual poetry 운동은 나름 일맥상통하는 맥락을 가지고 있다.
디카시는 시인의 주관성에만 의존하여 시를 생산하지 않고 사진 이미지라는 객관적 재료를 경유하므로 전통적 서정시에 비해 확실히 주관성을 약화하고 객관성을 전경화하는 장르 고유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디카시의 사진 이미지는 마치 엘리엇의 객관 상관물과 유사한 역할과 기능을 담당하면서 창작 과정에서 주관적 감정의 토로 대신 비개성적인 표현 방식을 더욱 따르게 만든다. 디카시의 이런 경향은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에 인간 중심적인 철학을 넘어 물질과 비인간 존재로 사유의 중심을 점점 더 옮겨가고 있는, 신유물론 등 최근의 포스트휴먼적posthuman 사유의 흐름과도 본의 아니게 일정한 접점을 갖는다. 디카시를 이렇게 인간-주체 중심의 주관성(서정성)의 상쇄와 객관성의 전경화로 읽어내려는 입장은 거칠게 보면 이상옥 교수의 입장과 다소 상치된다고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상옥 교수는 『디카시 창작 입문』에서 디카시가 “서정시의 시적 세계관을 더욱 강화하는”(76) 것이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옥 교수가 디카시를 서정성의 강화로 읽어내는 것은 사진이라는 객관적 질료 사용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미적 해석의 ‘즉순간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디카시에서 사진 이미지는 한편으로는 즉순간성을 실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과정에서 과도한 주관성을 억제하는 매개의 중층적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마지막으로 이어 논의할 것은 디카시의 ‘즉순간성’에 관한 것이다. 이상옥 교수는 『디카시 창작 입문』에서 디카시를 “스마트폰(디카)을 이용해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감흥을 순간 포착하고 그 영상과 함께 짧은 시적 문장으로 표현하고, SNS 등으로 실시간 쌍방향 소통하는 창작 방식”(146)으로 정의한다, 이상옥 교수는 이를 간단히 “순간 포착, 순간 언술, 순간 소통의 예술”이라고 언급하기도 하는데 문제는 여기에서 말하는 ‘(즉)순간성’의 의미이다. 이상옥 교수의 즉순간성의 개념은 디카시 창작에서 가능한 한 인위적 기술(craft)의 개입을 방지하자는 것이다. 앞에서도 논의했지만, 이상옥 교수가 디카시의 사진 이미지와 문자 기호의 ‘배타적 완결성’을 거부하는 것도 바로 이런 논지에서이다. 다시 인용하자면, 이상옥 교수는 디카시에서 문자 기호는 문자시에서처럼 “완벽한 텍스트성을 갖추어서는 곤란하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상옥 교수가 “디카시에서 시인이 자연이나 사물에서 포착한 시적 형상을 ‘날시’라고 명명”(118)하는 것 역시 디카시가 인위적인 기술을 동원하며 사진 이미지와 문자 기호를 오래 조탁하는 것에 대한 거부의 표현이다. 문제는 디카시 창작의 실제 과정이 이처럼 이론대로 ‘즉순간적’으로 현장에서 바로 일어날 수도 있고, 사진 이미지와 문자 기호를 연결하면서 상대적으로 긴 조탁의 과정(시간)을 거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디카시에서 강조하는 즉순간성의 개념은 원론적으로는 유지하되 그 활용에 있어서는 창작자의 재량에 맡기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보면, 소위 ‘포토샵’으로 대표되는 사진의 수정 기술 역시 즉순간적 “날시”라는 디카시의 창작 원리에는 근본적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진의 수정이나 보정에도 다양한 시간대를 요구하는 다양한 기술과 강도가 존재하느니만큼 그것의 스펙트럼에 대해서도 일정한 탄력성을 견지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