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에 베이지 않도록
이수명 - 2025년 여름호
2025-06-15풀에 베이지 않도록
이수명
풀이 움직였다. 풀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있었다. 풀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얼룩무늬 고양이였다. 바람이 일어 풀이 움직일 때 고양이도 꿈틀거리는 것이었다. 고양이가 어디를 보는지 모르겠다. 시선이 조금 먼 곳을 향한 듯했다.
고양이의 시선을 따라 나도 그 조금 먼 곳을 바라보려 할 때, 갑자기 고양이가 몸을 돌려 나를 보았다. 나를 보고 있었다. 풀에 붙은 두 개의 노란 물방울, 떨어질 듯하다가, 잠시 후 고양이는 시선을 거두고 풀 속으로 사라졌다. 고양이는 없고 풀이 일렁일 뿐이었다. 이제 풀은 고양이를 짓지 않는다. 고양이를 떨쳐낸 것일까. 나도 풀을 따라갔다. 내가 본 것이 고양이가 맞는지 모르겠다. 풀에 베이지 않도록 했다.
이수명 시인
1994년 『작가세계』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 『왜가리는 왜가리 놀이를 한다』 『붉은 담장의 커브』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마치』 『물류창고』 『도시가스』를 출간했다. 산문집 『나는 칠성슈퍼를 보았다』 『내가 없는 쓰기』 『정적과 소음』, 연구서 『김구용과 한국 현대시』, 시론집 『횡단』, 『표면의 시학』, 평론집 『공습의 시대』등이 있다. 박인환 문학상, 현대시 작품상, 노작문학상, 이상시문학상, 김춘수시문학상, 청마문학상을 수상했다.
AI 해설
이 시는 매우 섬세하고 감각적인 시적 언어로, 존재와 인식, 자연과 인간, 경계와 감정의 흔들림을 그려낸 작품입니다. 겉보기엔 단순히 고양이와 풀이 등장하는 정적인 장면 같지만, 그 안에는 감정의 진동, 존재의 불확실성, 기억과 감각의 충돌이 응축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