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장마

안수현 - 2025년 가을호

2025-08-11

마른장마

 

 

 

안수현

 

 

 

망상이 있으시네요,

보통 사람들은 역사책에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그런 답안은 적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 무엇을 위해 살아가나요, 저 말고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없는 세계를 어떻게 버티나요,

무얼 위해서 하루를 견디나요,

 

정답지 없는 문제를 푸는 시간

어릴 때 이상한 습관이 있었는데

문제지에 바로 답을 적지 않고 꼭 답안지를 본 뒤에

생각했던 답과 같으면 동그라미,

다르면 세모를 그리는 거였다

답안은 꼭 정답으로 적어내야 했고

빗금은 절대 긋지 않았다

아는 건데 헷갈렸을 뿐이라고

거짓말을 꼬박꼬박 밥 먹듯이 했다

 

도망칠 곳이 없다, 이곳에서는

비가 내리면 그대로 맞아야 한다

무엇이 정답인지 감도 오지 않아서

생각나는 대로 답을 적었다

정답이 원래 없는 문제라는데

풀이를 마친 나는 아픈 사람이 되었다

의심했다 어떻게 생각나는 대로 말한 게

나를 그렇게까지 진단하는 단서가 될 수 있는지

 

거짓말, 선생님도 나처럼 거짓말쟁이야

어디까지가 증상이고 어떤 기분이 정상인지

판단할 수 없다는 점까지가 증상이라면

고질도 병이라고 부를 수 있나요?

나 벌써 무릎의 시큰한 감각으로

오후의 날씨를 알아낼 수 있는데

 

말간 표정을 짓는 방법

아픈 마음으로 일상을 짓는 방법

바람이 불어오는 모양을 읽는 방법

울고 싶을 때 비가 내리게 하는 방법

정답 없이도 행복해지는,

서러워도 살아가는 방법

아무도 답을 알려주지 못하는 물음들을 안고

문을 나선다

우산을 꼭 쥔다

언젠가는 맑은 날이 온다고

우린 이미 밝은 마음을 안고 산다고,

그렇게 믿고 견딜 수밖에 없다고 되뇌며

무릎을 한번 매만지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안수현 시인

2025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