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축의 美

고경숙 - 2025년 가을호

2025-08-11

압축의 美

 

 

 

고 경 숙

 

 

 

 

당신과 내가 마주 서있다

 

어디 출신이냐고 어린 시절은 어땠냐고 묻는 동안

맨드라미 피어있는 고향역과

천식 심하던 이국의 허름한 기숙사와

망고를 좋아하던 어린 소녀와

낙서하듯 울먹이던 서로의 전화 목소리가 압축된다

 

공간은 이기적이어서 곧잘 시간을 초월하지

운명을 말하며 몇 번의 여름과 겨울을 더 압축시킨다

 

우리 사이의 거리가 더 더 압축되고,

긴 입맞춤과 뜨거운 포옹이 허락된다

그 허락은 우리가 했으므로

그때 마주 선 다리 아래로

뜨거운 바람이 불었을 거야

메리제인 뒤꿈치를 든 만큼의 오차가 어긋난 거였다면

우리의 시간은 그때부터 탕진이라고 불러도 돼

 

당신과 내가 돌아선다

 

어디로 갈 건지 어떻게 살 건지 묻지 않고

만료된 여권으로 행선지도 정하지 않은 서로를

무심히 압축한다

 

공간은 이기적이어서 곧잘 추억을 대체하지

 

집주인은 가방을 문밖으로 내놓고 서둘러 먼지를 털고

헤링본 복도의 삐걱거리는 소음을 따라

당신과 내가 서서히 공간에서 압축된다

 

 

 

 

 

고경숙 시인

2001년 계간<시현실>로 등단.

시집『모텔 캘리포니아』,『달의뒤편』,『혈을짚다』,『유령이 사랑한 저녁』,『허풍쟁이의 하품』,『고양이와 집사와 봄』(2023 아르코문학나눔도서 선정)

청소년소설 『프리즈』. 수주문학상, 두레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