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아산 엘레지

고재종 - 2025년 가을호

2025-08-11

백아산 엘레지

 

 

 

고재종

 

 

 

  산이 짧은 팔을 내밀어 따개비 집들을 겨우 붙들고 있지요. 어느 집 돌담에서 도망쳐 나오다 걸린 금낭화가 붉은 눈물을 흘리고 있고요. 쇠잔한 마을의 후예인 동행의 시인이 시오리 자길 길을 읽으며 등교했다는, 산자락 학교 화단엔 신경림의 농무가 서 있네요. 빨치산 딸이 생의 신산을 몰래 우려낸 사제 막걸리 한잔은 그 무게만큼이나 묵직하고 씁쓸하고 시큼한데요. 그의 어머니들은 밤손님들에게 밥을 해주다 경찰의 유도에 넘어간 막내아이의 실토로 뚝뚝 동백꽃으로 스러졌다는 곳. 장삼이사 두세두세 좀 많이는 떠난 자리에 아직도 ‘바르게 살자’는 돌비는 장엄하네요. 아무렴, 초롱꽃 같은 시인이 애틋해져선 중학교 때 말도 못 꺼내고 가만가만 뒤만 따라오던 남자아이를 추억하듯, 이젠 다만 아른아른 시심으로 저며 드는, 뭐랄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그저 그렇게 있는 마을이 그저 그렇게 있지요. 보고지고 보고지고 임의 얼굴 동백꽃으로 피우고, 듣고지고 듣고지고 임의 노래 동박새 소리로 참 많이는 울었던 마을. 못내 돌아 나오는데 마을회관 담벼락엔 동백꽃 꽂은 여인 하나가 산을 등에 지고 동구 밖을 오래오래 바라보고 있었는데요. 사랑이 깊어도 해줄 것 없어서 그만큼의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던 시인의 엄마가 막내딸을 배웅하는 환영이었을까요?

 

 

 

 

 

고재종 시인  

1984년 <실천문학> 등단.

시집 『꽃의 권력』, 『고요를 시청하다』, 『독각』 외 다수.

신동엽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영랑시문학상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