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망의 현絃

손창기 - 2025년 가을호

2025-08-11

섬망의 현絃

 

 

 

손창기

 

 

 

한때 폐를 열어 서로 냄새 맡고

꼬리 치며 가족을 부르던

젊은 피아노, 연주되기 전에 속속들이 말을 걸어주었지

벽이 울리고 아파트가 춤출 때까지

 

제각각 슬픔이 늘어나면서

리듬과 아이와 아내가 뛰놀던 속도가 빠져나가

검질긴 시간과

컹컹, 구석에 내몰려 아름답게 어두컴컴해진

 

페달을 밟는 이도, 건반 두드리는 이도 없어

장기가 멈춰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버릴 수도 그냥 둘 수도 없어

서로 멈춰서 젖은 눈썹 껌벅이고

냉습한 공기만 어스름의 현을 툭툭 치고 가지

 

종종 주인에게 엉겨 붙지만,

윤기 나던 털은 빠져 음의 방향을 쓰다듬지 못하고

몸은 뒤틀려 목쉬고 무뎌진 악센트들

 

때론 즉흥 환상곡에

슬몃, 마음 간지럽혔던 선율을 얹어보기도 하는데,

화음이 진행되지 않고 음색이 다르게 들리지

냉장고에서 떡국 꺼내 절구통에다 찧는 섬망이랄까

 

섬망에 빠진 늙은 애완견의 꿈속에

나를 꾀어가거나,

내가 꾸는 꿈속의 꿈에

그가 들어와 조율하려고 장난치는 것일까

 

 

 

 

 

손창기 시인

대구 군위 출생. 200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달팽이 성자』,『빨강 뒤에 오는 파랑』이 있음.

제1회 웹진 시인광장 디카시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