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친구가 정신과 약 먹는 여자를 싫어해요
고선경 - 2026년 봄호
2026-04-01남자 친구가 정신과 약 먹는 여자를 싫어해요
고선경
타투를 한 여자와 살찐 여자를 싫어해요
나는 모르는 사람에게 길을 알려 달라고 애처롭게 빌었다 망원에서 감자튀김에 맥주를 양껏 마신 뒤였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고 나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남자 친구에게서는 헤어지자는 연락이 왔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
불꽃놀이가 끝난 난지한강공원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모든 게 시시하다는 듯이 발걸음을 옮겼다 버터 바른 오징어 굽는 냄새가 희미하게 풍겨 왔다 나는 식탐이 큰 편은 아니지만 배가 고파졌다 배가 고파지면 뒷일을 예상할 수 있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 모든 건 너의 선택이야
자유롭게 선택해 네가 나를 버려도 사람들은
나를 미친놈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어?
사람들을 이해해 보고 싶었다 다정하게 불리고 입술을 맞대고 함께 취할 때까지 술을 마셔도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잘라 말하는 사람들을 내가 넘어지면 깜짝 놀란 눈으로 잠시 내려다보지만 끝내 손 내밀지 않는 사람들을 불꽃놀이가 끝난 난지한강공원을 우르르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고독과 시끄러움을
빠져나가지 않고
좀 더 남아 있기로 결정한 사람들 중에는 연인이 많았다 그들은 서로의 어깨에 팔을 두르거나 손을 잡았다 나도 그런 동작은 해 보았고 할 줄 알았다 실패할까 겁을 내기는 했어도
*
집에서 경찰을 불렀다 남자 친구가 나를 위협했어요 라이터로요 코앞에서 불을 켜면서 너 같은 건 당장이라도 어떻게 해 버릴 수 있다고 했어요 어떻게요? 그게 잘, 생각이 안 나요
이 모든 건 너의 선택이야
너는 충분히 자유롭지
기억이 안 난다고요? 경찰이 되물었고 남자 친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 일에 관해서는 남자 친구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술을 많이 마셨으니까요 경찰과 남자 친구는 웃으며 대화를 나눴고 별다른 조치 없이 경찰이 떠난 뒤에 나는 어째서였는지 (선택권을 쥔 사람으로서였는지) 남자 친구를 부드럽게 불러 세웠다
왜 그랬니?
너야말로 왜 그랬니? 내가 너를 위협하다니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러겠니?
그때가 유일하게 남자 친구가 나를 좋아한다고 인정한 순간이었습니다
*
영화 상영 시간을 기다리며 커피숍에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왜 나를 좋아하니?
간단한 질문이었지만 왠지 설명하기 어려웠다 내가 우물쭈물하자 남자 친구는 인자하게 웃었다 너, 살이 좀 빠졌다?
*
남자 친구는 내가 여자로 느껴지지 않는대요
여자로 느끼기 위해 여태껏 애써야 했대요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고 해서 운동을 관두지는 않았지만 내 몸은 점점 거대해져 갔다 버터오징어구이 냄새를 맡으면 여전히 입에 침이 고였다 먹을 수 있는 것을 닥치는 대로 먹어 치웠고 때로는 먹을 수 없는 것까지도 먹어 치웠다 이를테면 기억 혹은 망상 이런 말을 하면 불리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내가 정말로 자유롭다면
입속에서 폭죽을 터뜨리고 싶다 난지한강공원을 통째로 삼키고 싶다 혀가 두근거릴 때마다 온몸이 비대해지고 싶다 하루가 다르게 거대해진 몸이 잠에 들었을 때만 잠잠해지겠고 먹다 만 슬픔은 차갑게 식어 버리겠지
*
택시 안에서 바라본 창밖 풍경이 눈부셨다 플라타너스 잎사귀, 잎사귀, 잎사귀 인도에서 유아차를 끌고 가는 젊은 여자가 맞닥뜨리게 될 놀라운 순간들을 상상해 보았다 아기의 연약한 손가락 발가락이 점점 길어지는 아름다운 성장 하루가 다르게 두툼해져 가는 일기장 숟가락에 올린 음식을 호호 불어 먹일 때 벌어지는, 복숭아 껍질 조각 같은 입술 건너편에서 젊은 남자가 젊은 여자를 향해 달려왔다 무의식적으로 그가 아기의 아버지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고선경 시인
2022년 ≪조선일보≫신춘문예
시집 : 『샤워젤과 소다수』,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
산문집 『내 꿈에 가끔만 놀러와』, 『29.9세』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