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월 Memory Wall
이형초 - 2026년 봄호
2026-04-01메모리월 Memory Wall
이형초
나는 당신과 함께 벽의 곡선을 따라 걷는다 벽은 거대한 손의 형상이다 당신은 벽이 얇아서 더 아름답다고 말한다 얇은 손으로 무얼 잡을 수 있겠어요, 나는 이 벽의 끝이 두렵고
뒤통수에 던진 돌
차갑게 식은 새의 발목
붙잡을수록 부러지던 얼굴
벽 속에는 세계가 있고 세계의 눈동자에는 틈이 있고, 틈 속에는 젖지 않는 눈송이가 날린다 어루만질수록 단단해졌던 날들, 너머가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
모두 차곡차곡 쌓아 무덤을 만들었는데
당신은 내 일생의 끝자락을 따라 걷고 있다
칼날로 이름을 긁고
돌 하나를 빼내 보고
벽 너머로 쓰레기를 던져보면서
이 조형은 지나치게 섬세해, 당신은 손끝으로 구멍을 더듬는다
나는 더 정교해진다
해가 지자 바닥에 조명에 켜진다 누군가는 국화를, 또는 위패를 꽂으며 기도한다 모든 것은 바닥의 빛을 통과해 드러날 거라고, 당신이 나를 벽 끝에 세운다
길을 적시는 황혼과 함께
나는 벽이 되어간다
벽은 풍경이 되어간다
당신이 떠나고 누군가 내 앞에 선다 내 심장을 만진다 여기 아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그가 발끝부터 천천히 굳어간다 아는 손금이 한 뼘 더 자랐다

이형초 시인
202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등단
2024년 제23회윤동주시문학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