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비의(秘義)
유계자 - 2026년 여름호
2026-05-30꽃의 비의(秘義)
유계자
호수가 백련을 껴입었다
호수 뒤편 도축장의 비린내도 만개했다.
한쪽은 너무 희고 한쪽은 너무 어두워서
산책은 슬펐다
누군가 말했지
네 몸에도 죽음이 함께 자라고 있다고
내 몫으로 할당된 그 적막한 지분이
피비린내처럼 입안에 고였다
눈이 맑은 소는 끝까지 사람을 의심하지 않고
외마디 울음을 허공에 걸어두고
눈꺼풀을 천천히 덮었을 것이다
공포를 배설한 자리에 바람은 별일 없는 듯 지나가고
길 끝 정육점에서 환한 꽃등심을 천천히 바라본다
죄책은 항상 가장 연한 부위에서 느껴지는데
살의 무늬는 입속에서 사라질 뿐
도덕은 혀끝에 닿지 않는다
호수가 전부 소복으로 갈아입더라도
은은한 향기가 도축장까지 건너가더라도

유계자 시인
2016년 《애지》등단.
시집 :『오래오래오래』,『목도리를 풀지 않아도 저무는 저녁』,『물마중』.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22년 중소출판사 출판콘텐츠 선정, 웅진문학상, 애지작품상, 평사리문학대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