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촉한 초코칩
정끝별 - 2026년 여름호
2026-06-01촉촉한 초코칩
정끝별
계곡을 거슬러 자작나무 숲을 지나
산벚나무들이 호위하는 볕 좋은 곳에
고소하게 구워지는 집 한 채가 있어요
부지런한 해와 달이 들락이며 밤과 낮과 계절을 지피고 있어요
숲길이 끊기고 계곡마저 잠기고
잘 치댄 반죽처럼 쭈욱 늘어났다 끊긴 숲속에
화초 잡초 거미줄에 둘러싸여
넉넉한 토핑처럼 낙엽 잔설 풀꽃이 뒤덮인 집에는
온갖 뿌리와 벌레가 장기 투숙해 살고 있는데요
이 집은 어떻게 이런 것들을 다 불러들였을까요?
흰 우유에 초코칩을 적셔 먹으면 더 부드럽고 달아요, 서울우유와 때로는 칙촉칙촉이 담긴 검은 비닐봉지를 건네주고는, 말문을 닫고 잠만 잤던 당신의 오리엔트 손목시계와
부스러기를 흘리면 벌레가 슨다니까요, 촉촉한 촉구에도 눈을 흘기며 초코칩을 베어먹고는, 침대 밑에 둔 신발을 수시로 확인하고서야 잠에 들던 당신의 달콤한 섬망과
믿음직한 흙표 중력분에 툭툭 던져넣은 피와 살과 뼈와, 깜깜한 기억과, 무엇이든 부풀게 하는 망각의 베이킹파우더와, 녹아드는 버터향 햇살과
촉촉한 초코칩이든 노릇한 칙촉 칙촉이든
잘 섞인 반죽이 둥그렇게 부푸는 동안
있으나 없으나 나를 떠나 당신이 굽힌
좋으나 싫으나 당신을 따라 내가 굽힐
두고 간 신발이 다 닳도록
다 닿았으니 편히 깃들도록
오래 구워질수록 아무것도 아니었듯 아무도 아니도록
다 벗어놓았으니 이제 다 잊도록
당신이 당신 아닌 당신으로 촉촉이 구워질 때까지
내가 나 아닌 나로 노릇노릇 다시 구워질 때까지

정끝별 시인
198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 『와락』, 『은는이가』,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모래는 뭐래』등.
유심작품상, 소월시문학상, 청마문학상, 현대시작품상, 박인환상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