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이 보이는 것 보다 가까이에 있습니다

최인호 - 2025년 봄호

2025-02-16

 

 

 

 

사물이 보이는 것 보다 가까이에 있습니다

 

 

최인호

 

 

 

발을 밟았다
출근길 지하도
안경을 벗으면 눈이 달라질 것 같은 남자
그 눈도 가짜일 것 같은 남자
같은 계단을 여섯 번도 넘게 오르내리며 출구를 찾으면서도 여기가 어디쯤입니까 단 한 번 묻지 않았던 남자

 

1999년 12월 31일, 잠에서 깨면 지붕을 뚫고 밀레니엄이 운석처럼 떨어져 있을 줄 알았지요 스무 살 되면 운전을 할 수 있게 될 줄 알았고 서른 살이면 누가 결혼 시켜주는 줄 알았어요 인생 빠꾸 없지요 지하철 타고 출근하는데 술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하고요 지금은 막 길을 잃은 참입니다 

 

미필적 고의.
배트가 공을 때려 
홈런을 만드는 힘

 

미필적 고의.
파도가 파도를 밀어내고
편편이 부서지는 햇살 위로
무수한 난반사가 일어났다

 

나중에 문득 억울하고 화가 나더랍니다 오래 전에는 산타를 믿었는데요, 하필 술 취한 아버지가 양말이 찢어져라 선물을 쑤셔 넣는 것을 봐버린 겁니다 어렸을 적 꿈은 우주선이 되는 거였는데 말입니다 어쩔 수 있나요 그저 밤새 메리 크리스마스였겠죠

 

출근길 지하도
안경에는 정밀하게 교정된 세계가 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여 사과를 최대한 정중하게 만들고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남자
하루 종일 코트 주머니에 손을 숨기고 다닐 남자
말하자면 오늘도
밀레니엄입니다

 

 

 

 

 

 

 

최인호 시인

1988년 서울 출생.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AI 해설

 

 

이 시는 삶의 혼란과 기대의 어긋남을 담고 있다. 출근길 지하도에서 길을 잃고도 묻지 않는 남자는 삶 속에서 방황하지만, 무심한 태도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대변한다. 어린 시절 꿈꿨던 미래는 현실과 다르게 흘러가고, 산타를 믿던 순수한 시절도 어른이 되면서 깨져버린다. 미필적 고의라는 표현은 삶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국 그렇게 흘러가는 것임을 의미하며, 매일 반복되는 출근길조차도 여전히 밀레니엄처럼 새롭고 막막한 순간으로 남는다. 결국, 현실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그 속을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