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

손현숙 - 2025년 봄호

2025-02-17

 

 

 

 

타인

 


손현숙

 

 

 

누가 입꼬리 살짝 들어 걸어온다 모르는 얼굴인데 아는 사람이다 엉겁결에 마주 잡은 손, 아무리 생각해도 캄캄하다 어느 바람결 삼삼한 시간 속에서 우리는 다정했겠다

내일을 열듯 택배 상자를 풀어헤치다 보면 버젓이 코앞에 버티고 선 물건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없는데 명부에 이름 새기듯 또렷한 나는 나를 잊었다 

어제는 나였지만 내가 아닌 것 지금은 어림감도 잡히지 않는 나를 나는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옷장 속에 걸려있는 옷들이 새삼 낯설다 어깨 뽕을 빼서 입어도 유행은 이미 흘러갔다

현관문 비밀번호 까먹어서 문짝을 모두 뜯어버렸다는 친구의 말속에는 분노보다는 유머가 짙다 분노 이전과 이후로 기원이 달라졌다 그러니까 나는 나를 알고 있다는 말, 과거의 나는 모르는 타인이다

 

 

 

 

 

 

 

손현숙 시인

서울에서 태어나 1999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손』『일부의 사생활』『멀어도 걷는 사람』과 사진 산문집 『시인박물관』『나는 사랑입니다』『댕댕아, 꽃길만 걷자』가 있음. 제14회 김구용시문학상,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상 수상.

 

 

 

 

AI 해설

 

 

이 시는 자신과 타인의 경계가 흐려지는 경험을 다룬다. 낯선 얼굴이지만 어딘가 익숙한 사람, 기억에 없는 물건들이 버젓이 존재하는 상황은 자신의 정체성이 흐려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다는 인식, 그리고 옷이나 유행처럼 변해버린 시간 속에서 자신조차 낯설게 느껴지는 감각이 강조된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잊은 친구의 이야기처럼, 과거와 현재의 단절은 때로는 유머로 표현되지만, 그 안에는 정체성의 혼란과 변화에 대한 묵직한 질문이 담겨 있다. 결국, 과거의 나는 알 수 없는 타인이며, 지금의 나조차도 확신할 수 없는 존재임을 시는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