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옷의 느낌
손택수 - 2025년 봄호
2025-02-17
흰옷의 느낌
손택수
흰옷이라고 다 순백은 아니다
그 사이 얼룩이 졌다 나도
얼룩을 빼는 세탁술이 더는 통하지 않는다
지우개로 문지르고 문질러
종이 결이 일어나듯 나달거리는 섬유
거기엔 덜렁거리는 거동을 얌전케 하던 중국집과
옷깃에 묻은 누런 때에 언짢던 출근길이 있다
비위가 좋은 유채색 계통들만 즐겨 입다가
이게 무슨 냄새야 코를 쥐고 대놓고 눈을 흘기는 사람들
엘리베이터 안의 화끈거리던 무안도 숨어 있다
흰옷이라서 이런 고백이라도 하는 거지
더는 지울 수 없는 이 흔적들이야말로
풍화의 기억들이 아닐 것인가
벽을 타고 흘러내린 빗물 자국처럼
내가 그들의 노트인 줄도 몰라
지금은 없는 무엇을 이렇게 간직하고 있는 줄도 몰라
거무튀튀 주름과 잡티로 꺼칠해져 가는 얼굴이긴 해도
흰옷을 입는다 명색이 흰옷이라
그런 날은 옷감도 감각이라는 걸 갖게 된다
손택수 시인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목련 전차』『나무의 수사학』 등이 있음. 노작문학상, 신동엽문학상 등 수상.
AI 해설
이 시는 흰옷을 매개로 하여 시간의 흐름과 기억의 퇴적을 탐구한다. 순백의 상징인 흰옷이 얼룩지고 닳아가는 과정은 인간의 삶이 쌓여가는 방식과 닮아 있다. 시인은 세탁과 지우개의 무력함을 통해 과거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음을 보여주며, 얼룩진 흰옷을 하나의 기억 저장소로 해석한다. 출근길, 중국집, 엘리베이터 안의 무안함 등 구체적 장면들은 개인적 경험을 넘어 보편적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더 이상 지울 수 없는 흔적들이야말로 오히려 존재의 증거이며, 풍화된 기억들이 된다. 벽에 흐른 빗물 자국처럼 흰옷은 사라진 것들을 간직하는 매개체가 된다. "명색이 흰옷이라"는 구절은 흰옷의 상징성을 강조하며, 흰옷이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감각적 존재임을 암시한다. 얼룩이 의미하는 시간의 축적은 결국 인간의 얼굴에 남겨진 주름과도 연결된다. 흰옷을 입는 행위는 기억을 몸에 두르는 일이며, 존재의 감각을 일깨우는 행위로 확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