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화

최문자 - 2025년 봄호

2025-02-17

 

 

 

 

초기화

 

 

최 문 자

 

 

 

우리가 거의 죽는 날

우리는 모든 걸 초기화한다

 

기적 같지 않나요?

세상이 끝없이 지워지지 않는 것

아니아니 지워지는 걸 끝까지 지키는 것

 

당신을 잊게 할 방법 있나요? 전원이 투입될 때부터 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있게 될 때까지 필요한 일련의 동작. 각 장치의 전원 투입, 동작 모드나 시스템 구성의 지정, 내부 상태의 초기화, 마이크로프로그램이나 각종 테이블의 적재 따위의 동작 지울 수 있나요?

모든 내부 기억 장치 요소가 정해진 논리 상태가 되도록 입력 패턴을 논리 회로에 적용하는 과정. 당신과 나의 시스템을 시작할 때 상태 머신이 규정된 초기 상태가 되게 합니다. 주기억 장치에 특정한 값을 쓰고 당신을 기억 장치를 초기 상태로 만들 수 있나요?

 

사랑하면 가능한 한 많은 종류의 리셋하는 것 싫지요 나중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기 때문 가장 두려운 종류의 리셋 중 하나는 나의 공장 초기화로 기기에 저장된 너를 완전히 지워 버리는 것

 

 

 

 

 

 

 

최문자 시인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현대문학> 등단. 시집『사과 사이사이 새』『파의 목소리』『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해바라기밭의 리토르넬로』 등이 있음.

 

 

 

 

AI 해설

 

 

이 시는 기억과 망각, 존재와 초기화라는 개념을 기술적 언어와 감성적 서사를 결합하여 탐구한다. "초기화"는 단순한 리셋이 아니라 기억을 지우는 행위이며, 이는 곧 존재의 흔적을 삭제하는 두려운 과정으로 묘사된다. 시인은 마치 컴퓨터의 부팅 과정처럼 사랑의 기억이 논리적으로 정리될 수 있는지를 묻지만, 결국 그것이 불가능함을 암시한다. 기술적 용어(“전원 투입”, “상태 머신”, “주기억 장치”)를 통해 감정을 기계적 절차로 환원하려 하지만, 오히려 인간적 고뇌가 더욱 부각된다. "가장 두려운 종류의 리셋"이라는 구절은 사랑하는 존재를 지우는 일이 단순한 망각이 아닌, 자기 정체성의 붕괴로 연결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기억을 지운다고 사랑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상실이 더욱 선명해진다. 결국, 이 시는 사랑과 존재의 본질이 리셋될 수 없는 것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