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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승섭 - 2023년 봄호
2025-02-18
권승섭
내 유년의 카메라 속에는 망해버린 유원지가 있어요 싸구려 티켓을 끊고 몇 번의 놀이기구 타며 찍은 사진들 서로 쳐다도 안 보고 찍힌 동생과 내가 있어요 찡그린 얼굴들 가득하지요 그 무렵 나는 문을 닫고 떠난 장소를 두고 망해버렸다는 말을 달고 살았어요 이를테면 망해버린 양산가게라던가 망한 구멍가게 그리고 사라진 유원지… 병든 목마들은 저편을 달리고 있고요 사진 속에서도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내 모습 때때로 꿈속에서도 꿈을 꾸고는 했어요 내 유년의 카메라 속에는 저수지가 끝도 없이 펼쳐지지요 유원지 뒤편에서 물가가 만드는 소란들 하늘은 고요하고 저어새는 시끄러워요 그런 물가에 살고 싶었어요 내 유년의 필름 속에는 헝클어진 잔물결들이 있어요 일회용 카메라 쥐고 좋아라 하던 아이는 자기의 카메라를 가지게 되었고요 레버를 돌리고 딸깍하면 바뀌는 장면이 있었어요 망해버린 기억들은 철거되고 남은 것들은 흉물이 되었지요 너저분한 메모리 내 유년의 물속에는 카메라들이 마음껏 떠다녀요 녹슨 범퍼카가 물속을 달리고 있고 회오리치며 작동하는 흐름과 소음들 청룡열차와 빙글빙글과 타임머신 동생과 나는 이마를 훤히 드러내고 웃는 건지 굳어버린 건지 모를 표정을 짓고요 여기 봐 여기 봐 하는 엄마를 찾고요 망해버린 유원지 구석에는 내 유년의 메모리가 있어요 렌즈구멍 같은 태양을 쳐다보고 잠시 시야가 어두워져요 선반 위에 진열된 빛 번짐들
이것은 미래다
모양이 다른 액자들이 벽을 가득 채우고 있고
이것은 잔상이다
카메라의 초점은 가장 아름다운 곳을 집중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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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엔 물푸레나무,
돌돌 말리면서 부푸는 잎사귀 필름들
내 유년의 유원지 뒤편에는 저수지가 있어요
내 유년의 물푸레나무 아래에는….
권승섭 시인
20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AI 해설
이 시는 유년 시절의 기억을 카메라와 유원지를 통해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과거의 기억들은 사라지거나 망가진 유원지처럼 흐릿하고 뒤엉켜 있으며, 사진 속 장면들은 잔상처럼 남아 있습니다. 특히 물가와 저수지는 유년의 감정을 담은 공간으로, 유동적이고 변화하는 기억의 속성을 상징합니다. 카메라는 그런 순간들을 붙잡으려 하지만, 결국 시간 속에서 희미해지고 마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에는 물푸레나무와 저수지가 등장하며, 기억이 자연 속에서 조용히 스며드는 모습을 암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