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에 새를 그리면 너는 새처럼 날아가고
박병수 - 2023년 여름호
2025-02-26
이마에 새를 그리면 너는 새처럼 날아가고
박병수
양서류의 저녁 같아서 개구리나 두꺼비의 우정이 몰려온다
석양은 어제보다 짧은 팔로 저물녘을 껴안더니 내가 접은 상자와 그 속에 든 사람들을 앗아갔다
안개가 피어나고 있습니다
하루의 구정물을 문밖으로 끼얹는 게 안개를 허무는 방식이라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그런 짓을 하지 않고
체념은 그와 나 사이에 거뭇한 타액을 묻혀 내 눈에 보인 것은 쿵쾅거리며 대문을 두드리는 귀신뿐이다
동쪽과 서쪽 창에 환희 불을 밝히고
벽에 새를 그린다
벽이 새처럼 날아간다
벽에 새를 그린다
벽이 새처럼 날아간다 점점 더 작아지는 목소리로
안개 속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었지만 안개 속을 떠도는 말이 진실일 수 없었다
아내가 아내에게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때처럼
’귓속을 아무도 없는 빈방으로 채웠으니 하루만 더 외로움을 견디거라‘
이 말을 한 사람이 살아 돌아올 리 없고
신이 가진 팔보다 긴 정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지 하면서 안개로 몸을 감싼 사람이 매일 밤 찾아와서 말 못 한 입술들을 꾹꾹 눌러 담은 나무들아 풀들아 너처럼 울었다
흰 꽃 같은 사람은 이름을 불러주면 돌아보는 습성만을 남기고 사라지고 날이 밝으면 하얗게 변한 머리카락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게 만져진다
내가 접은 상자는 무연고의 온기처럼 신발을 신겨줘도 사라지지 않는 거야.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좋겠다 날개를 그릴 수가 없을 테니까
2009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등단. 시집『사막을 건넌 나비』등이 있음.
AI 해설
「이마에 새를 그리면 너는 새처럼 날아가고」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외로움과 상실을 탐색하는 시다. 안개와 상자, 새의 이미지를 통해 불확실한 세계 속에서 소통의 단절과 정서적 고립을 표현한다. 시인은 벽에 새를 그리며 자유를 갈망하지만, 점점 사라지는 목소리처럼 그 바람도 허무하게 흩어진다. 안개 속의 말과 상실된 관계들은 진실에 닿지 못하고, 외로움과 체념만을 남긴다. 결국 시인은 날개를 그릴 수 없을 때 비로소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깊은 소망을 드러내며, 삶의 허무함과 탈출 욕망을 담담히 그려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