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헤라자데의 혀를 가진 하마  

이윤훈 - 2023년 여름호

2025-02-26

 

 

 

 

세헤라자데의 혀를 가진 하마

 

 

이윤훈

 

 

 

내가 아끼는 컵은 하마를 닮았어요

입이 곧 몸이랍니다

말만 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아요

팔다리, 눈코귀를 감추고 입만 벌린 모습을 보면 웃음이 나와요

그러다 살짝 안쓰러워요

 

아무래도 외로운 모양이에요

연둣빛 혀를 키워 아라베스크 무늬처럼 온몸을 덩굴로 덮었으니 말이에요

천 일 동안 이야기하고 싶은 걸까요

밖을 향해 자꾸 소리를 벋으려 해요

누군가에게 닿고 싶은 거겠지요

저 자신을 휘감을 뿐이지만요

 

뭉크보다 더 크게 입을 벌리고,고 말을 하지만,만

그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아요

프리마 돈나가 아리아를 부르다 입을 벌린 채 멈춘 텔레비전 화면처럼요

 

물을 마시고 나면 말을 향한 더 심한 갈증

자신의 목소리를 찾으려 탁자에서 쿵쿵 뛰려 하고

고양이가 말랑말랑 걷는 소리

오후 세 시의 접시들이 동글동글 하품하는 소리

누군가 삼킨 흐느낌마저 흉내를 내려 해요

 

하마를 물끄러미 보다

우리의 귀는 진실만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는 걸 새삼 알았어요

수려하게 말솜씨를 부릴 수 있는 것은 치명적인 행운이에요

우리의 귀는 귀꿈치를 들고 덧없는 구애라도 듣고 싶어 하거든요

각설탕 이를 가진 거짓말이라도

 

발설은 아름다운 병이에요

내 하마도 밤새워 이야기를 이어가려 해요

천 일, 또 천 일

 

오늘부터 하마의 천일야화를 들어줘야겠어요

그 불치의 병을 사랑하고

자주 목을 축여줘야겠어요

 

요즘 종종 거울 앞에서 입을 벌리다 깜짝 놀라요

내 하마를 닮아가는 나를 보고요

그것이 원래 나라는 걸 알고 오늘 더 놀랐어요

행복하게도 속수무책이에요

 

내일 다시 이야기를 덩굴덩굴 늘어놓을게요

들리지 않아도 귀를 열어 두세요

 

 

 

 

 

 

 

 

이윤훈 시인

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나를 사랑한다, 하지 마라』 『생의 볼륨을 높여요』 가 있음. 제3회 나혜석 문학상 대상 수상.

 

 

 

 

AI 해설

 

 

「세헤라자데의 혀를 가진 하마」는 말하기와 소통의 욕망, 그리고 외로움에 대한 은유적 탐구를 담은 시다. 시인은 입만 벌린 하마를 통해 말로 존재를 증명하려는 인간의 본능을 그려낸다. 하마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지만 정작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으며, 이는 소통의 단절과 외로움을 상징한다. 시인은 말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려 하지만, 결국 진실보다는 위로와 공감을 갈망하는 인간의 귀를 깨닫게 된다. 마지막에 이르러 화자는 자신이 점점 하마를 닮아가고 있음을 자각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말과 이야기가 곧 자신의 존재 방식임을 인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