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의 여름

권덕하 - 2023년 여름호

2025-02-26

 

 

 

낙원의 여름

 

 

권덕하

 

 

 

강물은 들판으로 거침없이 진격했다 물살은 비늘을 번득이며 둔덕을 넘어와 논과 밭의 경계를 지우고 길을 삼키고 낙원을 수중에 가두었다

 

현관 앞 계단을 슬금슬금 기어오르는 물의 저의를 살피다 쇠창살 같은 빗줄기 바라보며 수인처럼 몸 떠는데

 

사과나무 쪽으로 물뱀이 물음표 잔영을 남기며 쏜살같이 사라졌다

 

날이 어두워지면, 몸집을 불리고 있는 강물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 더 늦기 전에 낙원을 빠져나가야 하는데

 

물에 약한 세간들 다락으로 피신시킨 뒤 옷가지와 가방을 머리에 이고 집을 나섰다 허리 위까지 어지럽게 차오르는 흙탕물 헤쳐 가다

 

물에 잠긴 다리를 어림짐작에 떠밀려 더듬더듬 건너는 걸음마다 오금 저렸다

 

강물이 물러간 뒤 토우들이 햇살에 등 태우며 진흙을 긁어내다 날 저무는데

 

굴뚝에서 돌연 터져 나와 하늘 한 구석을 무너뜨리는 박쥐 떼

 

 

 

권덕하 시인

1994년 ‘화요문학’ 시선집으로 등단. 시집『생강 발가락』『오래』『맑은 밤』등이 있음.

 

 

 

 

AI 해설

 

 

「낙원의 여름」은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과 불안함을 생생히 그려낸 시다. 강물이 들판과 경계를 삼키며 낙원을 집어삼키는 모습은 평온했던 일상이 순식간에 혼란으로 변하는 순간을 상징한다. 물살에 쫓기듯 피난하는 화자의 불안과 두려움은 흙탕물을 헤치며 다리를 건너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결국 강물이 물러간 뒤에도 자연의 흔적과 상처는 남아있고, 날 저물 무렵 돌연히 날아오르는 박쥐 떼는 불안과 혼돈의 여운을 남긴다. 시는 아름다웠던 낙원이 순식간에 위협적인 공간으로 변하는 아이러니를 통해 인간 존재의 연약함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