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새

허인혜 - 2023년 가을호

2025-02-26

 

 

 

 

얼음 새

 

 

허인혜

 

 

 

냉동창고에서 갓 부화한 원앙 한 쌍

단상에 사뿐히 내려앉아

피아노 4중주에 맞춰 우아하게 날개를 편다

 

신부의 흰 드레스가 버진로드를 길게 끌고 간다

심장의 파동으로 은방울꽃 부케에서 자꾸 방울 소리가 굴러떨어진다.

신랑이 마른침을 삼킬 때마다

목의 벼랑에 겨우 접지하고 있던 나비가 균형을 잃었다

 

샴페인이 터지고 축배를 들자

한 줌의 내장도 없는 얼음 새도 입맛을 다셨다

아직 한끝의 혀도 생기지 않은 여린 부리는

순교자처럼 하얀 피를 흘리며 닳고 있었다

 

비상의 꿈을 키웠으나

기낭에서 가까운 깃털부터 뽑아

별빛을 복사한 천정으로 날려 보내주고 있었다

허구의 약속들이 크리스털로 반짝거렸다

 

차례를 기다린 접시 위에서

식욕보다 먼저 스테이크 육즙이 흘러나왔다

입술을 닦은 하객들의 냅킨이

디저트 접시에서 깃털처럼 팔랑거렸다

 

새가 날아간 자리 차가운 얼음 한 덩이 남아 있다

 

 

 

 

 

 


허인혜 시인

2018년 마로니에 전국 여성백일장 시 장원 등단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나도 누군가 먼저 그려준 그늘이었다』가 있음. 2022년 경기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AI 해설

 

 

「얼음 새」는 결혼식이라는 화려한 순간 속에서 감춰진 허상과 덧없음을 상징적으로 그려낸 시다. 냉동창고에서 부화한 원앙과 얼음 새는 겉으로는 아름답지만, 본질적으로 생명력 없이 서서히 사라지는 존재를 암시한다. 신부의 부케, 신랑의 떨림, 하객들의 냅킨 같은 세밀한 이미지들은 결혼식의 장엄함과 동시에 불안정한 긴장감을 담고 있다. 특히 얼음 새가 혀도 없이 하얀 피를 흘리며 닳아가는 모습은 부부의 약속이 허구처럼 반짝이다가 결국 녹아 사라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마지막에 남겨진 차가운 얼음 한 덩이는 화려한 축제 뒤에 남은 공허함과 현실을 상징하며, 시는 사랑과 결혼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을 유려한 이미지로 풀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