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방
김경성 - 2023년 가을호
2025-02-26
푸른 방
김경성
시간을 저장한 방은 언제나 푸르렀다
지나간 시간을 불러내면 따라 나오는
수많은 기억의 조각들
그 사이에 머물렀던 것들을 보여주었다
나는 틈만 나면 지나온 시간 속을 들락거리며
스치듯 지나갔던 낯선 당신을 만나기도 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바다에 손을 넣어 휘저으며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물의 갈기를 움켜쥐었지만
스르륵 달아났다
더는 소금이 보이지 않는 폐염전에서
녹슨 못을 만지던 오후였다
족제비싸리가 꼬리를 흔들며 바람을 홀리고 있었다
외장하드 서비스센터에서 전화가 왔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눌러 두었던 당신의 흔적을 샅샅이 잘라놓아서
방에는 파편으로만 가득 차 있다고
더는 불러낼 수 없는 기억들
어쩌면 지워져 버린 것보다
더는 볼 수 없어서 잊혀가는 것이 두려운 것인지
찔레 가지가 온몸을 휘감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모두 지워진 시간이
폐염전에서 소금꽃을 피우고 있었다
2011년《미네르바》등단. 시집『와온』『내가 붉었던 것처럼 당신도 붉다』가 있음.
AI 해설
「푸른 방」은 기억과 시간의 흐름, 그리고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애틋한 성찰을 담은 시다. 화자는 푸른 방에서 과거를 불러내려 하지만, 기억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처럼 붙잡을 수 없이 흐른다. 외장하드의 손상된 데이터처럼, 남겨진 흔적들은 점점 파편이 되어 흩어지고, 결국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기억이 지워지는 것보다 그것을 다시 볼 수 없어 서서히 잊히는 것이 더 두렵다는 고백은 깊은 상실감을 드러낸다. 마지막에 폐염전에서 피어나는 소금꽃은 사라진 시간 속에서도 여전히 남아 있는 기억의 흔적과 그리움을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