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표정

서정임 - 2023년 가을호

2025-02-26

 

 

 

어떤 표정

 

 

서정임

 

 

 

나의 문장이 사라졌다

사월에 내리는 눈처럼 흔적도 없이

힘을 잃었다

 

당신에게 한 점 빛을 기대했던 나는

묵중히 몸을 짓누르고 있는 유리문을 바라본다

 

당신의 눈을 볼 수가 없다

내가 간곡히 건넨 말의 핵심이 당신에게는 그저

희미하게 스쳐 지나가는 눈보라 같은 것이었을 뿐

서명 받지 못한 계약서 같은 한 점 먹구름이

은행나무 위에 걸리고

울퉁불퉁 보도블록이 솟는다

백야에 뜨는 오로라는

어느 죽어가는 자가 내뿜는 간절한 눈빛인가

 

길 잃은 허방 위로 시곗바늘이 돈다

빨라진 초침처럼 다시 한번 당신에게 건네는 문장들

하지만 이미 저 표정 없는 표정 속 당도해 있는 계절에

모래바람이 인다

그래도 나는 나만의 표정을 내려놓지 못하고

 

내렸으나 내리지 않은 눈송이 같은

그 사산된 낱말들을 붙잡고 있는 나는 마침내

어느 먼 대륙처럼 당신에게서 멀어지고

자동 센서가 작동하지 않는 출입문 앞

영산홍이 그만 다문 입을 삐죽이 내밀고 있다

 

 

 

 

 

 

 

서정임 시인

2006년 <문학선> 등단. 시집『도너츠가 구워지는 오후』『아몬드를 먹는 고양이』가 있음

 

 

 

 

 

AI 해설

 

 

「어떤 표정」은 소통의 단절과 이해받지 못하는 감정을 담담하면서도 서늘한 이미지로 표현한 시다. 화자는 자신의 말이 상대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사월의 눈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상대의 무표정 속에서 절실한 감정은 희미한 눈보라처럼 스쳐 지나가고, 결국 화자는 점점 멀어지는 듯한 고립감을 느낀다. 자동 센서조차 반응하지 않는 출입문 앞에서, 영산홍이 삐죽이 내민 모습은 더 이상 닿지 않는 소통의 단절을 상징한다. 시는 말이 닿지 않는 관계 속에서 오는 외로움과 소통의 부재를 섬세하게 형상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