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
송은숙 - 2023년 가을호
2025-02-26
멍
송은숙
멍이 들었다는 건
내가 어딘가 움직여 갔다는 것이다
누워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누군가와 싸웠다는 것이다
책상 모서리나 의자 다리나 바닥이나
돌멩이나 나무그루터기나 비탈이나
그러므로 나는 전사의 후예다
문턱을 넘으려다 나동그라져
어깨 위에 훈장처럼 멍이 들었을 때,
문을 나와
다른 세상으로 가려면
자줏빛 구름 속을 지나야 한다
자주색은 연지벌레나 꼭두서니에서 나온다
그 귀하다는 페니키아의 자주 조개에서
자주색은 황제의 망토 색, 교황의 법의, 가시관 아래 흘린 피
나는 망토를 휘날리며, 스텝을 건너온 적에게 달려든다
방패와 창이 부딪치고 누군가의 칼이 어깨를 내리친다
사이프러스 나무 둥치에 앉아 숨을 고르니
산등성이에 부딪혔던 노을이 내 어깨에도 내려앉는다
자주와 파랑 갈색 노랑으로 서서히 몸을 바꾸며
어느덧 황제의 별이 떠올랐다
툰드라와 초원과 사막을 돌아
별의 길을 돌아 돌아온다
평범해져서
시시해져서
아, 바짓단에 묻어있는 낙타털 몇 가닥
송은숙 시인
2004년 <시사사>로 등단. 시집 『만 개의 손을 흔든다』『얼음의 역사』등이 있음.
AI 해설
「멍」은 상처와 움직임을 통해 삶의 역동성과 경험의 흔적을 조명하는 시다. 화자는 멍이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 몸을 움직이고 세상을 마주하며 얻은 전사의 훈장처럼 여긴다. 자주빛 멍이 황제의 망토와 가시관의 피로 이어지며, 상처는 곧 역사와 경험의 일부가 된다. 격렬한 싸움과 여정을 지나 마침내 별이 떠오르고, 화자는 광활한 초원과 사막을 돌아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마지막에 남은 낙타털처럼, 격렬했던 삶의 흔적은 미세하게나마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음을 시는 은유적으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