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방울의 잉크 속에서 우리는 태어났지요

김향숙 - 2023년 겨울호

2025-03-01

 

 

 

 

한 방울의 잉크 속에서 우리는 태어났지요

 

 

김향숙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거리 
둘러앉을 수 있는 간격과 반경이 없다면 
오롯이 모여드는 주변들은
한낱, 꽃다지를 흉내 내는 한여름의 
불무더기에 지나지 않겠지
흔들리는 말투도 흐르는 시간도
어떤 표정도 넘어올 수 없지

 

개미들도 길이 있어 
행동반경에 닿을 수 있지
비탈과 기슭은 또 하나의 선
흔들리는 나무도 흐르는 강물도 영역이 있어 
자연의 일부가 되었겠지

 

그 경계까지 혹은 맞닿음까지 
허락된 거리만큼 다가갈 수 있어 
국경은 아름답겠지
인력의 간극을 무시한다면
일그러지거나 깨지고 말겠지
깨진 거울의 반쪽도
넓거나 좁거나 높거나 낮게 이탈하겠지 
세상의 어떤 힘겨움도 반경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겠지 

 

점점이 이어지는 창문을 이웃이라 칭하면
몇 개의 불빛이 마을로 돌아와
백지 한 장 꺼내 글을 쓰고 있지
문장을 마치는 잉크 방울도 풀잎 끝에 맺힌 물방울도
자신의 반경을 알고 있지
태양계라는 말과 우리라는 말이
지구와 달의 만유인력을 벗어난다면 
우주는, 당신은 헝클어지고 말겠지  
당신은 당신이 될 수 없겠지

 

 

 

 

 

 

 

김향숙 시인

2019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질문을 닦다』가 있음.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상, 호미문학상, 최충문학상 대상 등 수상.

 

 

 

 

AI 해설

 

 

이 시는 ‘거리’와 ‘반경’이라는 개념을 통해 관계와 경계를 탐구합니다. 사람과 사물, 자연과 사회가 각자의 영역을 가지며 조화를 이루지만, 그 경계를 무시하면 균형이 깨질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개미의 길, 나무와 강물의 흐름처럼 세상은 정해진 반경 안에서 질서를 유지합니다. 그러나 그 거리를 인정하고 조율할 때 국경도, 관계도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만유인력을 비유하여, 모든 존재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의 의미를 갖는다는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