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뒤에 먼 곳이 생겼다>

시인선 097 / 하두자 시인

25-06-30 15:49

 

하두자 시집(시인수첩 시인선 097)

 

침묵조차 기도인 것처럼,

나는 나의 언어를 다시 부른다.

 

 

 

하두자 시인은 1998년 문예지 『심상』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한 이후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한국 현대시의 시인이다. 그의 작품세계는 일상의 소소한 장면 속에 깃든 미시적 감정과 존재의 잔잔한 울림을 투명하게 응시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삶의 일상적인 풍경을 마주하면서도 단순한 서정에 머물지 않고, 그 너머에 자리한 내면의 결핍과 관계의 심연을 조심스럽고도 세밀하게 포착하는 점이 그의 시의 특징이다.

하두자 시인은 『물수제비 뜨는 호수』, 『물의 집에 들다』, 『불안에게 들키다』 등의 시집을 발표하며 내면 지향적이고 고요한 시적 사유를 펼쳐왔다. 초기 시집에서는 존재론적 응시와 정적인 내면 세계가 중심을 이루었다면, 『불안에게 들키다』에서는 불안이라는 정서를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며 감정의 미세한 떨림을 언어로 포착해내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2020년에 출간된 시집 『프릴 원피스와 생쥐』에서는 이러한 그의 시세계가 한층 더 깊어진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시집에서 하두자 시인은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정서의 층위를 탐색하고, 결핍과 부재의 정서를 담담하면서도 날카롭게 드러낸다. 그의 언어는 과잉되지 않으면서도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따라가며, 때로는 수학적 은유나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찰나의 심리적 동요를 드러내기도 한다. 황정산 평론가는 이 시집을 "결핍과 부재의 언어들"이라는 말로 평하며, 그가 펼쳐 보이는 관계와 존재의 심연에 주목한 바 있다.

이런 하두자 시인이 이번에 도서출판 <여우난골>에서 자신의 네 번째 시집 『이별 뒤에 먼 곳이 생겼다』를 냈다.

 

책속에서

 

그날

우리는 모두 교복을 입고 동원되었다

줄을 맞추어 부산항 제3 부두로 걸어갔다

 

애국 소녀가 되어 월남전에 참전하는

맹호부대를 향해 당신들의 안녕을 위해

끝없이 함성을 지르며 깃발을 흔들었다

 

장병들과 어깨동무한 당신의 군가 소리가 바다보다 더 높았다

 

맹호부대 용사들아 살아서 돌아오라

 

태극기를 흔들며 외치는 소녀들의 함성에

군인들은 주소를 적은 쪽지를 던져주었지

 

울컥거리며 올라오는 용암처럼 던져주던

쪽지에서 옅은 폭탄 냄새가 났다

 

거기엔 당신들의 막막한 주소가

눈물처럼 번져 있었다

 

전장에 자식을 보내는 어미의 눈물이 번져있었다

 

배가 출항하자

뱃고동 소리가 조문 행렬처럼 길게 울렸다

 

나는 이별 뒤에 먼 곳이 생겨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제3 부두를 걸으면

야자수 나무가 정글처럼 훌쩍 자라나곤 했다

포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부산항 제 3부두

어쩌다 신문에 탱크 사진이 실리는 날이면

비석같은 파도가 우뚝 솟구치곤 했다

― 「제3 부두, 하노이」 전문

 

 

지난밤이 하얘

 

나는 좁은 숲을 지나 길고 깊은 부활의 숲을 지나

우리라는 관계 속으로 빠져들었다

 

눈이 내려

보이는 곳과 지워지는 곳을 낯설어하며

무심하게 ‘함께’라 말하며 걸었다

 

사방이 고요했고 허무했고 눈발은

말의 수천 수만의 조각으로 솔솔 날려

갈라터진 발자국을 덮어주었다

 

손바닥을 비비듯 움푹 패인 귓바퀴 속으로

나는 배신이 한 문장 속에서 오래 맴돌았다

 

‘함께’라는 말은

누구도 모르는 사이가 되어

은박지처럼 혼자서 창백하게 표백되는 것이었다

 

눈 위에 찍힌 발자국마다

보르헤스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모래의 제국이 자꾸 무너져 내렸다

 

말줄임표 같았다

― 「말줄임표」 전문

 

 

집은 견고하다 이것은 나의 집착

엉겅퀴 꽃은 동물적이다 이것은 나의 편견

비의 손톱이 유리창을 긁어도 저녁은 조용하다 이것은 나의 오독

 

부드럽거나 둥근 것에 대한

나만의 논리가 없으므로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린다 거울이 눈동자만 남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난 생각하는 식물로 정의될까 빈말을 욱여넣는 도도새로 정의될까

 

아무도 없는 밤

확, 하고 뜨거운 영혼이 치밀어 오를 때

또 다른 궤도로 진입하는

나는 너의 사전에 없는

종족

 

나는 처음부터 나의 밖에 있었으므로

너와는 맞아떨어지지 않는

나는

 

자신의 운명을 매단 그물 밖으로

독을 뿜는

불온한

최초의

― 「유령거미」 전문

 

 

 

★★

[출판사 서평]

 

하두자 시인의 시집 『이별 뒤에 먼 곳이 생겼다』는 개인적 기억과 사회‧역사적 상흔 그리고 내면의 심연을 섬세하게 엮어낸 시집이다. 이 시집은 제목이 암시하듯, 이별이라는 사건이 만들어낸 감정의 먼 지평을 탐색한다. 그 이별은 단순한 개인적 관계의 단절만을 뜻하지 않는다. 국가 폭력의 그림자, 질병의 고통, 죽음의 예감 그리고 삶 속에서 반복되는 소멸의 장면들이 겹겹이 얽혀 있으며, 시인은 이를 통해 '먼 곳'으로 밀려난 존재들의 운명과 내면을 응시한다.

시집의 첫 시편인 「언니, 딸기」에서 하두자는 월남전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소녀의 성장기를 교직한다. 딸기밭에서 자라나는 언니의 모습과 “딸기에서 폭탄 냄새가 났다”는 충격적인 이미지는 생명과 폭력, 성장과 파괴가 얽힌 시대적 상황을 선명히 드러낸다. 군인의 시선과 위협 속에서 춤추며 자라난 소녀들의 사랑과 희생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이의 복잡한 감정이 딸기라는 상징 속에 응축된다. 딸기를 먹을 때마다 폭탄 맛이 난다는 절묘한 역설은, 시대의 폭력이 개인의 일상과 내면에 스며드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다른 시편들에서도 고통의 서사는 이어진다. 「미열」에서는 병리학적 진단의 냉혹함과 그것을 견디는 존재의 상처를 흑백의 엑스레이 이미지 속에 담아낸다. 종양이라는 생물학적 질병조차 “나비 모양”으로 보는 시인의 시선은 고통 속에서도 끊임없이 생명과 존재의 형상을 찾아내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나비는 “구원이 닿지 못한 흰나비”로 남으며, 삶의 끝에 닿아도 해소되지 않는 슬픔과 두려움이 여전히 어른거린다.

「폭설에 대한 감상」은 부러진 소나무 가지를 통해 아버지의 병실과 죽음의 기억을 겹쳐놓는다. 눈 덮인 정원과 아버지의 병상, 깨진 유리창 너머로 들여다보는 교실 풍경 등은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시공간으로 펼쳐진다. 이 시에서 죽음은 폭설처럼 예기치 않게 들이닥치지만, 시인은 유리 파편을 치우듯 그 잔해 속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읽으려 한다. 부러진 것은 소나무가 아니라 자신이었다는 자각은 남겨진 이의 애도와 슬픔을 절제된 언어로 전한다.

이 시집에서는 또한 죽음을 앞둔 이별의 시간과 애도의 정서가 여러 시에서 반복된다. 「엎드리다」에서는 요양원의 쓸쓸한 풍경 속에서 죽음이 조용히 자리를 옮긴다. 청운 요양원이라는 공간은 푸른 희망이 아닌 암묵적인 블랙홀로 변모하며, 남겨진 이는 “다른 행성으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는” 노인의 꿈을 바라보며 또다시 엎드린다. 죽음은 소란스럽지 않고, 오히려 조용히 일상의 한켠에서 스며든다.

이와 같이 하두자의 시집은 삶의 고통과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도, 이를 과장하거나 감상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사건의 표피를 벗겨내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잔잔한 심연을 드러낸다. 「상상 이별」과 「말 줄임표」 같은 시편에서는 관계의 소멸과 배신, 끝내 채워지지 않는 정서적 공허를 유리잔, 오르골, 눈발 등의 이미지로 섬세하게 묘파한다. 관계의 단절 속에서도 끝내 남는 것은 “말 줄임표”처럼 명확히 규정되지 않는 여운이며, 이는 하두자의 시적 태도 자체를 상징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하두자의 『이별 뒤에 먼 곳이 생겼다』는 한 사람의 기억 속에 파묻힌 여러 이별의 얼굴들을 불러낸다. 사회적 폭력과 병, 죽음과 고독 그리고 사랑과 상실이 얽혀 있는 이 시집은 삶의 부유물처럼 남겨진 슬픔들을 서늘한 시선으로 응시한다. 그 속에서도 시인은 끝내 “엎드린다”. 그것은 좌절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삶의 진실을 받아들이려는 시인의 윤리적 선택처럼 보인다. 삶은 결국 이별을 품고 먼 곳으로 떠나는 여정이다. 하두자는 그 여정을 조용히, 하지만 깊은 울림으로 기록하고 있다.

 
 

시인의 말

 

바람이 슬쩍 건드린 몸살이

풀어지지 않는 지금

무심한 얼굴이 모두 잠자는 시계 같아요

수신인이 되어 준

당신에게 즐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20256

하두자

 
 

하두자 시인

 

1998심상으로 등단하여 시집으로 물수제비 뜨는 호수』 『물의 집에 들다』 『불안에게 들키다

프릴 원피스와 생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