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시편>

박현수 시인

25-09-17 13:54

 

시국시편

박현수 시집

 

 

★책 소개★

 

 

새로운 신화의 설계자 문신(文神)의 귀환

한 권의 시집으로 완성된 『시국시편(詩國詩篇)』에서 시국은 시가 신이므로 ‘시의 나라’를 구축한다. 국가가 국민, 영토, 주권을 통해 존립할 수 있듯이, 시의 나라는 국민이 시인이 되고, 영토가 시인이 거주하는 땅이 되며, 주권은 시가 됨으로써 국가의 3대 요소를 갖추어 국가가 된다. 시로써 통치 조직을 갖춘 시의 나라에서는 시가 그 자체로 모두가 시인인 국민을 실현시키는 목적이 된다. ‘신의 나라’에서는 신의 도구로서 신을 통해 가치를 실현하지만, ‘시의 나라’에서는 시가 의무인 것과 동시에 권리이며 모두의 주체성을 확립시키는 공통된 삶이다. 그러므로 시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시인들에게 있어서 자신 내부에 새겨지는 것은 이상적인 공통의 언어가 되며 인식의 총합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 의식의 민족과는 다른, 공동 이데아 차원에서 주체성을 각성하고 공통된 감각으로 재현되는 시의 통치 작용이다. 시만이 통용되는 시의 나라는, 개인의 삶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시로써 자유롭게 나누어 가지는 이상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다.

― 권성훈(문학평론가, 경기대 교수)

 

★시인의 말★

 

혹자는 시국은 신화에 불과하다고 하며 혹자는 호사가의 잡설이라 한다 허나 시국 시인 지훈(芝薰)이 이른바 시를 위하여 연애하는 사람, 시를 내놓고는 살 수 없는 사람, 시인이란 말 듣기를 즐기지 않는 사람만이 시의 나라에서 총애 받으리라 시의 나라에서 자기의 생활과 감정이 멀어질 때 우리는 아무런 미련 없이 시의 국토를 표연히 떠나야 할 결백성을 지녀야 할 것이다 운운하였으니 여기에 말하는 ‘시의 나라’,‘ 시의 국토’가 시국 아니면 무엇이랴 이에 시국이 없다고 누가 함부로 혀를 놀리리오

* 시국 시인 지훈의「 서창집(西窓集)」에 전한다.

 

 

◨시집 속의 시 두 편

 

<천하도를 읽다 1>

 

이런 지도 한 장 갖고 싶었네

우리가 다 아는

조선국도 있고, 중국도, 일본국도 있고

우리가 알 만한 유구국, 안남국도 있는 지도

그렇지만

우리가 꿈꾸는 상상의 나라도 그려진 지도

남쪽 바다 안에는

신선이 산다는 봉래, 방장, 영주라는 산이 있고

바다 저 멀리에는

어진 이들이 산다는 군자국이 있고

그 아래엔 여인들만 산다는 여인국도 있는 지도

동쪽 바다 안에는 털 많은 모민국(毛民國)이 있고

서쪽 바다 어딘가에는

한 눈만 있는 사람들의 나라, 일목국(一目國)이 있는 지도

남쪽 바다 한 가운데에는

아무도 죽지 않는 불사국(不死國)이 있고

북쪽 바다 한쪽에는

귀가 긴 사람들의 나라, 섭이국(聶耳國)도 그려진 지도

지상의 삶이란

어디쯤 상상의 세계를 끼고 있는 것임을

넌지시 깨우쳐 주는 지도

우리가 디딘 이 세계가 이미

몽상의 대륙이라는 걸 알려주는 지도

아무도 포착할 수 없었던

꿈의 위도와 경도를 당당하게 타전하는 지도

천하도(天下圖) 속으로

현실도 상상도 모두 망명하여

이 세상, 허전한 이유를 이제 알겠네

 

* 재수록(제3시집『 겨울 강가에서 예언서를 태우다』)

 

 

<혁명이 지나갔나 보다>

 

포고문처럼

신문을 읽던 시대가 있었다

어떤 반응도 허락하지 않는

진리의 문자를 읽던 시대가 있었다

시민은 착한 백성이 되어

공손하게 기사를 받들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언제인가

누구도 모르게 혁명이 지나갔나 보다

이제 기사마다

사람들의 대꾸가 들리는 시대가 왔다

찬탄이나 분노, 비아냥이

댓글마다

시장 바닥처럼 떠들썩한 시대가 왔다

저마다의 왁자지껄 속에

기사의 비열한 계략도

천박한 의도도

물 빠진 연못처럼 빤히 드러난다

그 왁자지껄 속에

뛰어난 표현으로 감탄을 자아내는

댓글시인이라 불리는

여항(閭巷) 시인도 숨어 있다

숨은 이인(異人)도 여럿 스쳐 간다

권력이란

이들의 이 깊은 바다 위를

잠깐 지나가는 한 척의 돛단배일 뿐

해적이 탔건 의인이 탔건 금세 지나간다

고 왁자지껄 속의 지혜가 반짝인다

이제 종이신문을 보아도

댓글을 찾아

눈이 저절로 아래로 내려가는 시대가 왔다

한밤의 소나기처럼

혁명이 지나갔나 보다

 

 

 

★Chat GPT 해설★

 

신화로 건설된 시의 나라

 

박현수의 《시국시편(詩國詩篇)》은 개별적인 시편의 모음이 아니라, ‘시국(詩國)’이라는 허구적 국가를 세우고 그 역사와 제도를 기록한 문학적 서사시다. 시인은 「시국유기 서」에서 출발하여 「시국본기」, 「시국정론」, 「시국열전」, 「시국잡설」, 「시국유기 발」로 이어지는 구도를 통해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펼쳐낸다. 이는 마치 고대 연대기나 신화집을 읽는 듯한 체험을 제공하면서, 시를 단순한 예술 장르가 아니라 공동체를 지탱하는 근본 질서로 제시한다. 태초의 혼돈에서 신들이 태어나 빛과 생명을 열어젖히는 창세 서사, 음악과 춤, 이야기의 기원을 관장하는 모신 ‘놀’의 전설은 곧 시의 본질을 드러내는 장치다. 시는 언어에 국한되지 않고 몸짓과 소리, 공동체적 연행 전체를 포괄하는 예술임이 강조된다. 또한 「제왕연대력」에서 향가, 시조, 가사, 자유시로 이어지는 문학사의 흐름이 신화적 족보로 재편되면서, 시의 역사는 단절이 아닌 필연적 계승으로 자리 잡는다. 전통은 우연이 아니라 운명적 계보라는 인식이 여기서 탄생한다. 무엇보다 이 시집은 시를 통해 국가를 설계한다는 점에서 독창적이다. 시국에서 국민은 시인이고, 영토는 시가 쓰이는 공간이며, 주권은 시 그 자체이다. “시는 곧 하늘(詩乃天)”이라는 선언은 이 나라의 근본 이념을 요약한다. 「반전 격문」에서 “시는 농사일 따름”이라 노래하듯, 한 편의 시는 씨앗처럼 뿌려지고, 싹을 틔우며, 결실을 맺는다. 이는 시가 단순한 미학적 유희가 아니라 공동체를 먹이고 살리는 힘임을 웅변한다. 동시에 시는 전쟁과도 같아 권력에 맞서는 무기로 기능하기도 한다. 이러한 양면성은 시가 지닌 사회적·역사적 긴장을 보여준다.

《시국시편》은 신화적 서술에만 머무르지 않고 동시대 현실을 날카롭게 비춘다. 「혁명이 지나갔나 보다」는 댓글 문화와 언론 환경의 변화를 통해 권력의 허위를 드러내고, 「국가적 은유」는 일상의 언어유희 속에 사회적 모순을 담아낸다. 고전과 현대, 신화와 현실이 교직되며 시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결국 이 시집은 시의 본질을 신화로 재구성하고, 신화를 다시 시의 언어로 새기면서, 시가 어떻게 현실을 견디고 공동체를 재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시국은 죽지 않는다. 지상에 시 한 줄이 쓰이는 한”이라는 선언은 작품 전체를 꿰뚫는 신념이며, 오늘의 문학이 여전히 살아 있는 이유를 증언한다. 《시국시편》은 현실의 위기를 넘어선 새로운 언어의 나라를 웅장하게 그려낸 시집으로, 시의 존재 이유를 새삼 환기하는 작품이다.

 

 

박현수

199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세한도」로 등단

현재까지 꾸준하게 창작 활동을 하며 시인이자 우리 시를 비평적인 안목에서 다루는 문학평론가이다. 현재 경북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에 교수로 재직중.

시집으로 『우울한 시대의 사랑에게』,『위험한 독서』,

『겨울 강가에서 예언서를 태우다』,『사물에 말 건네기』가 있으며, 평론집으로 『황금책갈피』,『서정성과 정치적 상상력』이 있다. 주요 문학 관련 학술서로『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수사학 - 이상문학연구』, 『한국 모더니즘 시학』,『시론』,『전통시학의 새로운 탄생』,『시 창작을 위한 레시피』,『시학 개념의 새로운 이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