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푸집의 국적>
황정산 시인
25-02-06 08:15
거푸집의 국적
황정산 시집
책 소개
시인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사라지거나 버려진 하찮거나 가벼운 (비)존재들을 불러와 시詩, 시집詩集이라는 형식의 “거푸집”에 다시금 소환하여 담아내고 그 형상들을 다시 살려내고 불러낸다. 시인은 잊혀진 존재들을 기억해내고, 더러는 아직 오지 않은 것들까지도 그것들을 기꺼이 ‘지금 여기’로 불러내어 살려내기와 애도하기와 도래하기를 종용하기를 동시에 시행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용적을 비우고” “사라지”고 사라져간 모든 것들이 지금에 남겨진 우리를 결국에는 살게 하고 “살아지”게 하는 존재들임을 시인은 일깨운다.
시는, (비)존재들, 유령들, 비체들 망각되거나 버려지고 잊혀진 그것들을 담아내는 새로운 용기勇氣이자 용기用器가 되고, 매번 새로운 거푸집이 되어 새로운 텍스트를 독자들 앞에 생경하게 펼쳐놓는다. 당신의 새로운 독서가 새로운 텍스트를, 새로운 거푸집을 완성할 것이다. 거푸집이 기억하는 거푸집, 거푸집이 재현하는 거푸집은 흔적이면서 현존을 드러내는 부재하는 것들을 불러오는 매개체가 되고 기억이 아닌 실재實在가 된다. 그 모든 사라진 거푸집들도 그러나 거푸집이라는 보통명사가 아닌 원래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저마다의 꿈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에게도 가족과 국적이 있었다. 처음부터 “거푸집”이나 “거시기”라고 불리지는 않았을 거푸집의 이름과 국적과 행방을 찾아서 불러주는 것도 이제 시인의 손을 떠나 당신의 몫이고 우리의 몫이다.
시인이 던지는 질문들, 명령어들, 수수께끼 같은 시편들에 독자들은 얼마든지 다양한 해석과 답변과 반박을 새롭게 내놓을 수 있다. 이 시집은 잠겨 있는 형식으로 열려 있다. 『거푸집의 국적』은 독자인 당신들이 거푸집 안으로 들어와 거푸집을 깨부수고 거푸집을 탈주할 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아직 오지 않은 잠재태의 시공간 안에 비밀스럽게 그러나 ‘능동적’으로 있다. 시집의 비밀번호는 오로지 독자인 당신만이 알아낼 수 있다.
-해설(김효은 시인, 문학평론가)중에서
시인의 말
모든 말은 원래 동사였다
움직이는 것들이 굳어 명사가 된다
아직 굳지 못한 기억
동사로 남아 꿈틀댄다
시집 속의 시 두 편
블랙맘바
돈다발 사이에서 너를 만났다
악당 빌을 죽이는 영화에서였다
뱀을 좋아하던 시절이었다
권법보다 칼보다 더 민첩하고 예리하게
눈먼 것들을 죽이고 있었다
주)
블랙맘바는 아프리카에 사는 독사이다
맹독을 가진 이 뱀은 아주 빠르기도 해서
치타를 뒤쫓아가 물어 죽인다고 한다
아프리카 사자의 개체수가 줄어든 것도 이 뱀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학계에 보고된 사실은 아직 없다
코끼리를 물어 죽이고 먹지 않는
정의를 위해서 눈을 어둡게 칠한
검은 입속에 희생자의 공포를 감춘
우리는 모두
잽싸거나 치명적이거나
거푸집의 국적
길가 공터에 거푸집이 포개져 있다
시멘트 얼룩을 지우지도 못하고
잠시 누워 쉬고 있다
거친 질감이 상그러워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흑단과 마호가니도 아니고
삼나무나 편백이 아니라 해도
그들도 이름은 있었을 것이다
와꾸나 데모도라 불리기도 하지만
응우옌이나 무함마드라 불러도 상관은 없다
어디서 왔는지 누구도 묻지 않는다
상표도 장식도 아닌 국적을
구태여 말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들도
타이가의 차가운 하늘을 찌르거나
우림의 정글에 뿌리내려 아름드리가 되길 꿈꾸었으리라
오늘도 도시를 떠받치던 불상의 목재 하나가
비계 사이에서 떨어지고 있다
이제 국적과 이름이 밝혀질 것이다
황정산
1958년 목포 출생. 1993년『창작과비평』 평론 활동 시작, 2002년『정신과표현』시 발표.
시집『거푸집의 국적』. 저서『주변에서 글쓰기』,『쉽게 쓴 문학의 이해』,『소수자의 시 읽기』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