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돌리며 왔다>

시인선 093 / 이현정 시인

25-02-18 09:08

이현정 시집(시인수첩 시인선 093)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김없이 뜨겁게

 

 

2018중앙신인문학상, 2019매일신문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현정 시인의 첫 시집, 지구를 돌리며 왔다가 시인수첩 시인선 93번으로 출간되었다.

이 시집은 무엇보다 그동안 반성하고 성찰해 온 생()에 대한 시인의 직관적 태도가 녹아 있으며 이를 정교하게 조절하며 우리의 평범한 일상어로 직조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근래 보기 드문 성취를 이뤄내고 있다. “이 시집의 큰 방향성은 결국 입니다. 삶의 여정과 소멸, 사랑과 이별, 아픔과 위로 등의 주제가 상상과 현실 속의 대상과 만나 시로 태어났습니다라며 인터뷰에서 고백한 것처럼 이 시집은 생활과 실존에 파묻힐 수 있는 삶의 본원적 그리움이다.

더욱이 시인이 늘 시선을 두는 곳은 우리가 주류가 아닌 변두리. 소위 주류라 불리는 공간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심지어는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구속하는 경향이 있다. 요컨대, 자유를 만끽할 시간조차 타인들에 의해 제어되며 그리하여 주체로서의 는 존재할 수 없는 곳이다.

하지만 변두리는 다르다. 소규모 공동체를 이룰 수 있고, 그 가운데 자신의 목소리를 또렷이 낼 수 있으며 내가 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이른바 상상하기 좋은 곳이라 시인이 명명한, 은밀한 다락방과 같은 헤테로토피아를 고집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모서리에서 죽도록 간절한삶의 의지를 읽어내고, ‘오답에도 빛을 찾아내며, 아무도 그 존재를 주목하지 않던 일본의 귀신 가오나시에서 맹렬한 사랑을 발견한다. 이러한 감각과 사유의 집중은 혀의 돌기로 변하는 순간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고요했던 순물질

비등점에

닿는 순간

 

최선의 방어이자

최후의 공격으로

 

, ,

들끓어 오르지

맹렬해진

심장의 서슬

 

차오르던 역한 기운

포화점을

넘는 찰나

 

한 모금 혼돈주로도

솟구치는 혀의 돌기

 

이맛전

짓이겨져도

치받아버리지

― 「, , 전문

 

을 멈추는 이유는 많다. 상대방과의 부드러운 대화를 이끌고자 할 때, 상대방의 고압적인 말투나 태도 혹은 전혀 예기치 못했던 상황이 발생할 때 등이 그것이다. 물론 내가 스스로 말을 끊어버리는 경우도 비일비재다. 그러한 사태가 지속될수록 의 내면에는 를 수복할 반전을 준비하게 된다. ‘혀의 돌기짓이겨져도 / 치받아버리로 변신하는 것이다. 물론 은 시인의 의지로서, 어떠한 난관이 닥쳐와도 밀고 나가겠다는 행위의 바탕이 된다.

이러한 반전은 이 시집의 대부분에서 발견되는바, “남아 있는 날 선 것은 치아밖에 없는 여인, / 집게 다리 하나 잘린 꽃게를 먹고 있다 / 모서리, 모서리끼리 입속에서 부딪혔다”(뜨겁게 2), “밤낮이 찌는 듯 / 한잠도 잘 수 없고 // 먼 산의 속울음조차 / 내 것인 양 메아리치던 // 그렇게 / 호흡도 타버릴 // 더운 밤이 다 있었다”(열대야), “어쩌면 냄비 받침이 될 / 시를 쓰고 모은다 / 누군가의 라면 냄비를 받치고 있다가 / 불현 듯 / 또 누군가에게 / 뜨겁게 읽힐 수 있다면”(뜨겁게 5)과 같은 문장으로 압축된다.

 

★★

 

 

다음은 시집에 관하여 시인과 나눈 짧은 인터뷰 내용이다.

 

[Q] 주제와 이야기의 방향은

 

[A] 다양한 주제와 이야기가 섞여 있지만, 이 시집의 큰 방향성은 결국 입니다. 삶의 여정과 소멸, 사랑과 이별, 아픔과 위로 등의 주제가 상상과 현실 속의 대상과 만나 시로 태어났습니다. 때로는 격렬함으로, 때로는 설렘으로, 때로는 갸륵함으로, 때로는 아픔으로, 때로는 허무함으로. 이 시집은 결국 나와 당신, 우리 주변의 이야기입니다. 생과 사, 그리고 희로애락이 담긴 절실한 노래입니다. 이렇게 담긴 이야기들이 늦게 도착할지라도 위로가, 통쾌함이, 사색이, 따뜻함이 필요한 곳에 잘 흘러가 닿기를 소망합니다.

 

 

[Q] 이번 시집의 특징은

 

[A] 비슷한 시상과 시의 언어를 중심으로 시집의 각 부를 묶었습니다. 1뜨겁게, 남김없이 뜨겁게는 뜨겁고 강렬한 감정을 담은 시가 주를 이룹니다. 2우주가 되는 공식은 영원한 문학의 주제인 사랑과 이별을 노래하고, 3그 갸륵함에 대하여는 오늘도 소리 없이 세상을 굴리는 갸륵하고 기특한 생에 대한 헌사를 담았습니다. 4을의 기록은 삶의 애잔함과 아픔을, 5새가 새를 잡아먹은 이야기는 관조와 허무의 시선을 담고자 했습니다. 각 부마다 집약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선을 따라가며 시에 온전히 마음을 맡기고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Q] 나는 어떤 시인인가

 

[A] 등단 이후 6년이 지났습니다. 그리 많지 않은 필력이라, 스스로 어떤 시인인지를 정의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다만 늘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새롭게 쓰는 사람, 마음의 통점이 깨어있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내가 어떤 시인이라기 보다, ‘어떤 시인이 되고 싶은 사람정도로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무엇보다 이제 제 손을 떠난, 저의 시를 읽는 분들이 제가 어떤 시인인지, ‘어떤 시를 쓰는 사람인지 각자의 답을 해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답신이 기다려집니다.

― 「저자와의 인터뷰중에서

 

 

이현정

2018년 《중앙신인문학상》, 201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였다.

2024년 서울문화재단 첫 책 발간 지원 사업에 선정되었다.

withyouhj@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