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를 잡는 잠>
시인선 095 / 이승예 시인
25-04-22 17:05
이승예 시집(시인수첩 시인선 095)
그로테스크, 달걀을 이해하는 실존적 생활방식
2015년 《발견》으로 등단한 이승예 시인이 시집 『코드를 잡는 잠』이 시인수첩 시인선 95번으로 출간되었다. 이승예 시인은 <김광협 문학상>(제5회), <모던포엠 작품상>(제20회)를 수상한 바 있으며 신인으로서는 드물게 치밀한 언어 운용을 통해 중량감 있는 문장과 이미지를 생산한다는 문단의 평을 받고 있다.
총 4부로 구성된 이번 시집은, 등단 이후 시인이 꾸준히 천착한 언어의 마지막 벽, 요컨대 극한에 이르는 상상력의 전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 또한 그 ‘언어’에서 비롯되는 언어 자체의 무수한 응축과 확장, 환원과 전개, 돌연한 등장과 사라짐 등을 오로지 시인이 이끌어낸 문장으로 답사(踏査)한다는 점에서 그 무게가 남다르다.
무엇보다 시인은 대상을 응시하되 단지 ‘바라봄’으로 그치지 않으며, 대상의 약한 고리와 미세한 균열을 찾아낸다. 이 과정에서 대상은 그것이 지금까지 유지해 왔던 형체를 벗어버리게 된다. 이를테면, “비가 내립니다 / 올려 치는 / 빗줄기를 당겨 팽팽하게 튜닝합니다 / 잠은 G 코드로 옮겨 갑니다”(「코드를 잡는 잠」)라는 문장에 나타나는 것처럼, 액체의 ‘빗줄기’도 금속성의 기타줄로 얼마든지 바뀌고 개방현을 충분히 활용하는 G코드의 맑고 청아한 화음을 생산할 수 있는 대지의 악기로 치환된다.
아울러 “곰팡이 냄새가 흐린 불빛을 켜 둔 / 여인숙에서 하룻밤 묵어간다 / 기대어 본 적 없는 벽엔 누가 헤어지자고 했는지 / 처진 어깨들이 촘촘히 걸려 있다 / 벽지에선 목단이 피느라 한창인데 / 맞대는 벽과 투숙객의 등은 딱딱한 질감을 가졌을까”(「어깨들이 저린 벽」)과 같은 문장은 기묘하다 못해 온통 그로테스크로 둘러쳐 있다. 하룻밤을 묵는 여인숙 벽에 처진 어깨들이 촘촘히 걸려 있다니, 그 환상에는 분명 씻기 어려운 통증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어떤 나라에서는
염소를 네 번째 천국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지요
염소 똥이 진리라고
나는 첫 번째 천국이라고 믿어요
흥건한 시간을 기록하는 힘이 있어요
― 「염소와 시인」 부분
도대체 염소를 네 번째 천국이라 부르는 나라가 있을까. 의뭉스럽게도 시인은 “염소 똥이 진리라고 / 나는 첫 번째 천국이라고 믿”는다고 선언에 가까운 말투로 고백한다. 이 문장은 그 진위여부를 가릴 수 없으며, 더더욱 사실이나 진리의 재현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 게다가 그 목소리도 거칠고 어떤 면에서는 음험하기도 하다. 이는 염소가 “흥건한 시간을 기록하는 힘이 있”다는 시인 나름의 실존적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지만, 이 문장은 역사 자체를 무위로 되돌리는 충격파가 압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으로의 진입은 절박하게 절벽을 뛰어내린, / 스스로 고난을 지고 절벽을 기어오른, / 저 좁은 통로를 걸어오는 당신과 / 저 좁은 통로를 걸어오다 되돌아가는 당신과 // 모두 차별 없이 저물어 가시지요”(「모넴바시아」)라는 문장이나 “식탁 위에 오를 노른자위와 노을이 졸아들고 / 무와 무의미도 졸였는데 난데없이 / 소크라테스와 한하운이 생각납니다”(「스패너」)와 같은 문장처럼 대상에 대한 실존적 자각은 평등을 통한 환유의 응집을 매개한다.
이러한 시도는 과거에서도 있었지만, 이승예 시인에게 이르러 좀 더 섬세하게 축조된다. 가령, “약속 시간을 12시로 잡으면 / 바다를 빗겨 파도 쪽으로 새벽을 끌어당길 수 있습니다 / 수백 번 찢고 수백 번 물에 담갔던 청바지 / 찢어진 바다를 입어보자고요”(「청바지를 입자고요」)라는 문장에는 굴지의 한국 제과기업과 미국 의류기업의 광고-이미지가 박혀 있으면서 동시에 ‘찢어진 바다’라는 환경의 문제까지 파고든다.
★★
◨ 다음은 시집에 관하여 시인과 나눈 짧은 인터뷰 내용이다.
[Q] 주제와 이야기의 방향은?
[A] 그동안 시를 써오면서 고민했던 부분을 일정 부분이라도 담아냈는지 생각해 본다. 괴테는 색채론의 물리색에서 “호주머니 칼을 촛불에 갖다 대면 색채를 띤 줄무늬가 칼날 비스듬히 생겨난다. 불 속 가장 깊은 곳에 있었던 부분의 줄무늬는 담청색으로 보이다가, 이내 적청색으로 변한다. 가운데 부분은 자색으로 보이다가 잇달아 주홍색과 황색이 뒤이어 나타난다.”고 말했다.
나도 몇 번은 보았던 현상이다. 나의 이번 시집의 주제를 굳이 정리해 본다면 억압된 분노와 생명의 존엄성, 그리고 어두운 사회적 상황 속에서 잊을 수 없지만 잊힌 것처럼 심연에 가두어 두었던 자아를 ‘꺼내기’의 시학으로 시도했다. 칼날에 생긴 줄의 변화하는 색채처럼 우울하기도 하고 명랑하기도 한 시편들이 변화무쌍해서 한 주제를 가진 색채는 아니다. 그러나 모든 시편에서 지양하는 방향은 억압된 감정에서 해방되어 그 감정에 직면한 나의 세상을 적게나마 정지시켜 놓았다고 말하고 싶다.
[Q] 이번 시집의 특징은?
[A] 이전까지는 시를 쓸 때 어떤 사건이나 강렬하게 오는 이미지에서 출발해 그것을 시로 치환하는 방식에 익숙했었다. 그러나 이번 시집의 시편들은 감정의 결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그 감정에 충실했으며 상상의 끝자락까지 밀고 나가보자는 욕심을 부려보기도 한 것 같다. 그래서 이전 시편보다 표현 방식이 좀 더 거칠기도 하고 강렬하기도 하며 진실하다고 생각한다. 이번 시집은 기존의 이미지 중심의 서정에서 벗어나 현실적 경험과 밀도 있는 상상의 사유를 나란히 놓아보려고 노력하였다.
[Q] 나는 어떤 시인인가?
[A] 누군가 이렇게 말해줬다—“이승예 시인은 무의식의 흐름을 섬세하게 언어화하는 데 중점을 두고 감정의 미묘한 떨림과 내면의 감각을 집요하게 탐색하며, 독자와의 정서적 공명을 추구합니다. 최근 시집에서는 감정에 충실하고자 하는 태도와 상상의 극한까지 밀고 나가는 시를 쓰려고 하는 시도가 돋보이며 강렬하고 진실된 시편들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나는 시를 쓰는 일이 좋다. 그 길이 오롯이 혼자 완성해 가야 하는 길이라서 외롭고 힘들 때가 많이 있지만 시를 써야 시가 된다고 했던 시인의 말을 생각하며 시를 쓴다. 그리고 시를 열심히 쓰는 시인들을 응원한다. 나는 앞으로도 시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며 시를 쓰는 일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것이다. 어쩌다가 시에게 발이 묶였다. 이승예 시인은 시에게 발이 묶인 시인들을 응원하는, 그런 시인이다.
― 「저자와의 인터뷰」 중에서
이승예
2015년 『발견』 을 통해 등단하였다.
시집 : 『나이스 데이』 『언제 밥이나 한 번 먹어요』 2020년 문학나눔 선정
제5회 김광협 문학상, 제20회 모던포엠 작품상, 선경문학상. 작품상 운영위원장등